1894년 4월[甲午四月]
괴산(槐山)과 연풍(延豐) 등지에 동학도의 세력이 이어졌다. 동학도의 무리들이 있는 곳마다 토호(土豪)들이 횡탈했던 재물을 징발하였는데, 더러는 팔을 때리기도 하고 혹 거세(去勢)하기도 하였다. 회덕(懷德)의 송씨(宋氏)와 노성(魯城)의 윤씨(尹氏)가 그 해독(害毒)을 전적으로 받았다. 조정에서 보부상을 모집해서 호남 초토소에 보냈다. 영(營)의 감독(監督)이 순절(殉節)하였다. 동학도 몇 백 명이 남원군사라고 가탁하여 일제히 전라감영에 이르렀다.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이 그들로 하여금 무기고와 화약고를 수비하게 했는데, 한밤중에 이르러 전주성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여 갑자기 감영 안으로 침입하자 김문현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조정에서 전라감사 김문현을 잡아들여 그 죄를 논하였고 새로 감사 김학진을 대신 보냈다. 흥양(興陽) 동학도가 전라감영에 있는 동도에게 사통(私通)을 보냈다. 그 대략의 내용은, “오늘날 우리들의 거사는 단연코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탐욕한 관리에게 스스로 움츠려 들게 할 바를 알게 하는 것이다. 또 국태공(國太公, 흥선대원군)으로 하여금 감국(監國)케 하여 위로 종묘사직을 보존하고 아래로 일반백성들을 편안하게 함으로써 부자의 천륜과 군신(君臣)의 대의를 온전히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끝부분에 위 통문을 창의소(倡義所)에 보내라고 쓰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