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년(1910년)≫
합방됨에 이르러 내전(內殿, 순종의 비)의 백부(伯父)인 윤덕영(尹悳榮)이 몰래 어보(御寶)를 훔쳐서 궁궐 밖으로 가지고 나와 자기 집에 두었다가 함부로 임명장을 작성하여 어보를 찍어서 원하는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주었다. 대개 조선에서 소위 반명하다는 자는 벼슬에 대한 열정이 많았으므로 비록 낮은 자급(資級)이라도 보배처럼 존귀하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그들은 교지(敎旨)를 사칭하고 어보를 사칭함을 따지지 않고 다투어 청탁을 도모하여 가짜 임명장을 하나라도 얻는 것을 마치 천금(千金)을 얻는 것과 같이 여겼다. 한번 주사(主事)의 직위를 차함(借銜)한 자를 정3품으로 만들고, 한번 의관(議官)의 직위를 차함한 자를 종2품, 정2품으로 만들었으니, 한 집안에 4~5명의 부자(父子)가 모두 영감과 대감이 되었다. 또 일찍이 이전에 유자(儒者)로 이름이 전혀 없었던 자와 충절과 공로가 아주 적었던 자들이 시호를 받음으로써 유학의 정신을 빼앗았다. 슬프다. 이 양반 사족들이 다만 이를 영광으로 여길 뿐, 국가가 무너지는 위급함을 알지 못하니, 이 어찌 제비가 불타는 집의 처마에 있으면서 타오르는 불길을 모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아, 저 역적 이완용은 안으로는 윤덕영이 양전(兩殿)을 미혹시키게 하고, 밖으로는 조중응(趙重應)과 송병준(宋秉畯) 및 여러 대신을 조아(爪牙, 맹수의 발톱과 어금니처럼 자신을 지켜 줄 심복)로 삼아 못된 계략을 함께 세워 흉악한 짓을 다하였다. 8월 모일에 이른바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원문결락), 법부대신 조중응, 농부대신 송병준, 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 탁지부대신 고영희(高永喜), 학부대신 이용직(李容稙) 등이 입궐하여 어탑(御榻) 앞으로 나와 엎드렸다. 이완용이 일본에게 나라를 양도하도록 아뢰고, 김윤식(金允植) 역시 원로(元老)로서 입참하여 국가를 양도하는 글을 지어 나라에 고시(告示)하였다.
역적 이완용이 마침내 옥새(玉璽)와 황포(黃袍) 및 임금이 사용하는 각종 물건을 빼앗아 통감부로 보냈다. -윤덕영이 모두 내어주었다- 황제께서 두려워하며 일본천왕에게 자신을 ‘신(臣)’이라고 칭하였다. 아, 하늘의 태양이 담하고 산천이 색채를 변하고 초목이 모두 마르고 짐승들이 모두 오열함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삼사육부(三事六府)를 혁파하고, 황실을 혁파하여 단지 이왕직(李王職)이라 칭하고 관리 몇 명만을 두었다.
황태자를 일본 동경에 인질로 보내고 규장각(奎章閣)에 소장된 역사책과 각 도(道)의 명산(名山)에 보관된 사고(史庫)의 서적들을 다 꺼내어 일본으로 실어갔다. 한국의 고위관리 72명을 봉하여 공 · 후 · 백 · 자 · 남(公侯伯子男)의 작호를 주고 은사금을 지급하였는데, 오직 윤용구(尹用求), 한규설(韓圭卨), 홍순목(洪淳馨), 조경호(趙慶鎬), 이종건(李鍾健), 유길준(兪吉濬)만이 ≪받지 않았다≫. -유길준이 말하기를, “임금은 지위가 낮아지고 그 신하는 관작이 올라갔으니 의리상 당연히 부당하며 은사금을 받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을미년 일에는 순신(純臣, 순수하게 신하의 본분을 지키는 신하)이 되지 못했고 또 귀국한 날에 권세를 빙자하여 임금을 멸시하여 제호(霽湖)의 행궁(行宮)에 억류되어 있으면서 영구히 빼앗았으니, 분수를 범하는 것을 어찌 분명히 분별하리오”라고 하였다- 고려가 멸망할 때 의리를 지키기 위해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간 자가 72인이었는데, 조선이 망할 때 관작에 봉해진 사람이 72인이었으니, 청탁(淸濁)이 어찌 그리도 다르단 말인가. 오직 전(前) 판서 김석진(金奭鎭)이 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전 판서 조정구(趙鼎九)는 칼로 자해하였으나, 의원의 치료로 죽음을 면하였다. 금산군수(錦山郡守) 홍범식(洪範植)은 목을 매어 죽으니 금산의 백성들이 일제히 나와서 상여를 메고 괴산(槐山)까지 옮겨 장례식을 치르는데,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기타 호남과 영남에서 경학(經學)을 강학하던 선비 중 자결한 이가 많았다. 그 후 평북인(平北人) 이재명(李在明)이 국적(國賊)을 죽이고자 맹세하고 이완용을 길가에서 칼로 찔러 창자까지 칼날이 들어갔으나 그래도 죽지 않았다. 의원(醫院)에 들어가 치료를 받았는데 개의 창자로 끊어진 창자를 이어 살아났다. 이 때문에 길가는 사람들이 이완용을 ‘구양대감(狗腸大監)’이라고 칭하였다.
함북(咸北) 출신인 전(前) 검사(檢事) 이준(李儁)은 헤이그(海牙, Hague)에서 만국(萬國)의 공사(公使)들이 모여 대담을 나누는 회의에서 본국(本國)의 주권이 빼앗겨 거의 망하게 된 사실을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고 칼로 자신의 복부를 찌르고 내장을 손으로 꺼내어 각국 공사의 좌석에 그 피를 뿌리고 죽었다. 이와 같은 충렬(忠烈)은 고금에 처음 있는 분이다. 만국이 모두 떠들썩하게 이를 말하고 신문에 이 사실을 전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