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년(1907)
평안도 의사(義士) 안중근(安重根)이 가슴에 충의(忠義)를 가득 품고 국적(國賊)에게 원수(怨讐)를 갚고자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하얼빈(哈爾賓)의 철도역 승강장에서 내릴 적에 총을 쏘아 사살하였다. 당시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 내부대신 임희준(任喜準), 법부대신 조중응(趙重應), 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 농부대신 송병준(宋秉畯)이 황제를 협박하여 황태자에게 황제의 지위를 물려주었다. 국민들이 분격하여 폭동을 일으켜 도성이 흉흉하였다. 황제의 지위를 선위하자, 새 황제는 창덕궁(昌德宮)으로 이어(移御)하고 태황제(太皇帝)는 그대로 덕수궁(德壽宮)에 거처하였다. 그리하여 영구히 서로 막혀 소식을 전할 수도 만날 수도 없었으니, 이는 모두 매국노가 한 짓이다. 당시 매국노를 육적(六賊)이라고 칭하였는데, 그들은 스스로 사업(事業)이라고 여겼다.
국조(國朝) 5백년 이래 윗사람을 범하고 흉모를 꾀하여 윤리와 기강을 무너트린 국가적 역적의 죄를 모두 씻어주었다. -이는 바로 그들이 죽은 뒤를 위한 계책이다- 또 문장을 잘하고 충효(忠孝)한 선비들 중 포양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 모두 시호를 내려주고, 근래에 이미 죽은 국사범들에게도 모두 아름다운 시호를 내려주어 충신과 역적이 혼동되어 구분이 없었다. 만일 성동주(成東洲, 동주는 成悌元의 호), 송귀봉(宋龜峯, 귀봉은 宋翼弼의 호), 서고청(徐孤靑, 고청은 徐起의 호)과 같은 어진 분에게 영령이 있다면 필시 눈물을 흘리고 시호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또 역적들은 황제를 강제로 제어하여 남북도(南北道)를 순수(巡狩)하여 유현(儒賢)과 충훈(忠勳)의 사당과 묘소에 치제(致祭)하게 하여 그들이 충현(忠賢)을 권장하는 뜻을 보였으니, 더욱 주벌(誅罰)해야 할 자들이다. 가소로운 일이다.
이 때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피살된 뒤 소네아라스케(曾禰荒助)가 대신 통감이 되었다. 사람됨이 온화하고 근신하여 특별한 학정(虐政)이 없었는데, 병으로 사직하고 떠났다가 죽었다. 데라우치마사타케(寺內正毅)가 통감이 되어 일한을 병합하고자 하여 역적 이완용과 은밀히 계획을 세우고 일진회장(一進會長) 이용구(李容九)와 송병준(宋秉畯)이 합방선언서(合邦宣言書)를 제출하여 신문에 게재함으로써 국민이 자원(自願)한다고 빙자하였다. 경향 각지의 사회단체가 이제 일제히 일어나 큰소리로 성토하니 전국이 들썩하였다. 하지만 입과 붓의 힘으로 어찌 칼과 총포의 힘을 당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