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년(1905)
일본 대사(大使)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가 우리나라에 와서 황제를 알현하고 일한협약서(日韓協定書)를 강제로 조인하게 하였다.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은 유학(儒學)을 배운 집안의 자제로 조금 식견이 있어 시비를 구별할 정도의 의리를 알았다. 처음에는 큰 소리로, “저들이 아무리 강제로 굴복시키려 해도 결코 조인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어서 외부 관원에게 말하기를, “만일 정부에서 인신(印信)을 입송하라는 명령이 있으면 모름지기 즉시 부(部)의 연못에 관인을 던져 버리고 절대로 입송하지 않도록 하라”고 말하고서 정부로 들어갔다. 밤중이 되자 정부에 있던 외부대신 박제순이 전화(電話)로 외부 입직관(入直官)에게 말하기를, “형세상 거역하기 어렵다. 인신(印信)을 즉시 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당시 입직관 어윤적(魚允迪)은 외부 소속 관원 김석영(金奭永)을 시켜 인신을 가지고 입송하게 하여 역적 박제순이 협정서에 조인하였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농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이 모두 연서(聯署)하니, 세상에서 오적(五賊)이라고 칭하였다. 오직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와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이 날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하영은 속으로 일본을 돕고는 겉으로 한국을 위한 척하였다. 참정 한규설(韓圭卨)이 발을 구르며 이를 꾸짖고 즉시 일어나 나아갔다. 대개 역적 박제순은 처음에는 비록 큰 소리를 쳤으나 끝내 거액의 뇌물을 받고 달갑게 매국(賣國)을 하였으니, 주벌(誅罰)을 당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뇌물을 받을 때 소개한 자가 구완희(具完熙)였다. 그 다음날 박제순이 구완희에게 서신을 보내어 ‘죽더라도 속죄하기 어려우니 어디에 몸을 둘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이토히로부미를 통감으로 삼아 한국 외부의 외교권을 박탈하여 통감부에 귀속시켰다. 각국의 공사가 모두 철수하고 단지 영사(領使)만이 남아 자국의 상민(商民)을 보호하였다. 한국정부의 각 부(部)에 일본인 고문관을 두었고, 통신원(通信院)을 양도하여 통감부에 귀속시켰다. 기타 크고 작은 국가의 정무를 모두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였다.
다음날 보국(輔國) 이하 여러 고위관리가 정부에 모여 거짓된 조약을 없애 버리고 나라의 역적을 엄히 토벌하는 일을 연명으로 상소하였다. 그런데 먼저 보국(輔國) 민영소((閔泳韶)가 벌벌 떨며 사양하였다. 계정(桂庭, 계정은 민영환의 호) 민공(閔公)은 제3의 석차로써 분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맹렬히 떨쳐 일어나 스스로 소두(疏首)가 되어 임금께 글을 올렸다.
임금은 백퇴(白退)하고 문 밖으로 내쫓도록 명하였다. 여러 고위관리들이 나와 평리원(平理院)으로 가서 엎드려서 서로 비장한 약속을 하였으나 일본군이 그곳에 출동하여 해산시키자 부득이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계공(桂公, 민영환)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잠시 자신의 겸인(傔人)의 집에 가서 홀로 묵었다가 그날 저녁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나라 사람들에게 유서를 남겼는데 문명국이 되어 국권을 회복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 뛰어난 충절은 해와 별처럼 밝게 빛난다. 또 피 묻는 옷을 마루 틈에 놓아두었는데 그 곳에 총죽(叢竹) 세 그루가 자생하였다가 몇 달 후에 푸르름을 간직한 채 그대로 말라버렸다. 이는 대개 고금에 없었던 충절이다. 당일 충정공(忠正公)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승지에게 명하여 가서 노친을 위로하고 어린 자식을 위문하였다. 장례식을 치르는 절차는 전례(前例)보다 더욱 넉넉히 행하였다. 이 날 각 모임의 사람들과 관리와 하인들이 일제히 나와 장례식을 도왔고 서로들 상여를 메고 용인(龍仁)에 가서 예법대로 장례식을 지냈다. 경성에서 장지(葬地)까지 여러 선비와 백성들의 울부짖고 곡하는 소리가 도로에 끊이질 않았다. 기절하여 길에 넘어진 자도 많았다. 이 때 고위관리 이하 선비와 백성 수만 명이 표훈원(表勳院) 앞에 모였다. 참정 심상훈(沈相薰)이 그 일을 주도하여 역적들을 성토하려고 하였는데, 일본 헌병이 칼을 휘두르며 돌진하여 강제로 해산시키고 고위관리를 마구 끌어냈다. 원임대신 조공 병세(趙公秉世)가 그들의 손에 끌려갔는데, 그날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참정 심상훈은 의젓하게 미동도 하지 않고 기색이 장엄하자 일본병사가 감히 손을 댈 수 없었다. 임금이 그가 자결할까 걱정하여 환관을 보내 궐내로 불러들여 붙잡아 두어 목숨을 살렸다.
유신(儒臣) 송공 병선(宋公秉璿)이 변고를 듣고 즉시 경성으로 올라와 대궐에 가서 임금을 알현하고 땅에 엎드리고 통곡하며 역적을 주벌(誅罰)하라고 거듭 청하였다. 임금이 목숨을 가볍게 여길까 걱정하여 합문에 물러나 휴식을 취하게 하였다. 임금 주위에 포진해 있는 역적들이 모두 물러나기를 권하였지만 끝내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경무사(警務使) 윤철규(尹喆圭)라는 자가 둘러대는 말로 유인하여 이리저리 돌다가 합문 밖으로 나오게 하였다. 여러 경관(警官)을 시켜 옆구리를 끼고 자동차에 태웠다. 자동차가 한번 달리자 순식간에 대전 구룡촌(九龍村) 우암선생(尤菴先生)의 옛 집에 도착하였다. 송병선은 그날 저녁 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고 부음이 알려졌다.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전 참판 홍만식(洪萬植)은 변고를 듣고 약을 마시고 죽었다. 충정(忠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공은 홍영식의 백씨(伯氏)로, 아우의 역모를 애통하게 여기고 나라가 거의 망하게 될 지경에 놓인 상황을 분하게 여겨 스스로 충절을 드러냈으니 그 의리에 처신함이 타당하였다- 학부주사(學部主事) 이상철(李相哲)과 진위대(鎭衛隊) 상등병(上等兵) 김봉학(金奉學)이 모두 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이상철은 학부협판(學部協辨)으로, 김봉학은 비서원 승(丞)으로 증직되었다.-
전 판서 면암(勉菴) 최공(崔公)-익현(益鉉)-은 고향집에 있다가 변고를 조금 늦게 들었는데 시국이 크게 바뀌고 임금이 계신 대궐과 멀리 떨어져 있어 상경할 수 없었다. 그는 역적을 토벌하라는 상소문을 올린 뒤 마침내 의병을 일으켜 호남에 가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하지만 일본 병사에게 붙잡혀 바다를 건너 대마도에 구금되었다. 8, 9일 동안 입에 물을 대지 않아 운명하였다. 상여가 돌아오던 때 부산에서 정산(定山)까지 여러 백성들이 호곡(號哭)하고 부의(賻儀)하는 제물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정권이 통감부로 넘어갔기 때문에 증시(贈諡)하는 은전이 내리지 않았다. 이 분의 충절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다. 5백년 윤리강상을 홀로 자임하시던 충신이었다.
이로부터 전국적으로 지방에서 의병이 계속 일어났지만 모두 효과가 없었다. 삼남지방의 글을 배운 선비 중 자결한 사람이 많았는데 송문충공(宋文忠公)의 아우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 역시 자결하였다. 송씨(宋氏) 집안에 어찌 그리도 충의를 세운 사람이 많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