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진년(1904)
태자비(太子妃) 민씨(閔氏)가 흉서(薨逝)하여 ‘순명(純明)’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강제로 신하와 백성에게 일년(一年) 복제(服制)를 정하니, 이는 전례(前例)에 없던 예(禮)이다. 이른바 상신(相臣)이 예법을 근거하지 않고 의주(議奏)하여 임금의 지시를 받아 반포하니, 이는 꾸짖어 벌을 주어야 마땅하다.
이 해에 이른바 이용구(李容九)라는 자가 동비(東匪)의 남은 무리로 송병준(宋秉畯)과 함께 표리(表裏)가 되어 서로 호응하여 일진회(一進會)를 창설하였다. 경성에 본부를 설치하고 각 도(道)와 각 군(郡)에 지회(支會)를 설치하였는데 그들의 소행이 분수를 범하고 못된 버릇이 아닌 것이 없었다.
내가 양근군수로 있을 때 그 무리들이 역시 창궐하자 내부(內部)에서 연이어 해산시키라는 훈령이 내렸는데, -조병식(趙秉式)과 이도재(李道宰)가 내부대신으로 재임하던 시기임- 이지용이 내부대신이 되자 도리어 보호하라는 내용의 훈령이 내려 왔다. 이 역적의 소행을 어찌 죽일 수 없겠는가. 송병준과 이용구 두 역적이 점차 흉포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지회에서 행정을 간여하고 지방관을 압제하였으므로 수령들이 관인(官印)을 풀어놓고 떠나간 경우가 많았다. 임금 가까이 있는 신하를 협박하였는데 어느날 저녁에 박용화(朴鏞和)를 칼로 찔러 죽이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 내부대신 이도재는 신중히 수령을 선택하고 공평하게 등용하려고 하였는데, 이지용이 또다시 하야시곤스케로 하여금 대궐에 아홉 차례 권고하게 하여 빼앗았다. 내부대신이 일진회에 더불어 호응하고 각 군수의 주본(奏本)이 한결같이 일진회의 요청에 따라 결정되었다. 저들 주머니의 수입은 모두 황금어음(黃金魚音)이었다. 대신이 이와 같으니 나라가 어찌 망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