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년(1902)
외부대신 이도재는 무척 강직하고 명석하였으므로 임금이 매우 신임하여 부(部)의 정무를 전적으로 맡겼다. 그는 모든 외교상에 있어서 조금도 국체(國體)를 손상하는 일이 없었다. 소위 이지용(李址鎔)이란 자는 본래 간사하여 황실(皇室)의 의친(懿親 : 정의가 두터운 친척)이 소중하다는 것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결같이 국가를 좀먹고 권세를 탐하는 것으로 능사를 삼았기 때문에 임금이 싫어하고 배척하였다.
또 이지용은 상복(喪服)을 입고 있는 중에도 벼슬길에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처럼타올라 구완희(具完熙)이란 자를 시켜 군부고문(軍部顧問) 노즈진부(野津鎭武)와 일본공사 하야시곤스케(林權助)와 관계를 맺게 하였다. 그리고 만약 외부대신이 되면 일본 측이 요구하는 대로 시행하겠다고 밀하였다. 하야시곤스케가 임금에게 재삼 권고하여 마침내 외부대신서리가 되었다. 며칠 되지 않아 일본공사 하야시곤스케가 호남 어업기지(漁業基址) 양도를 요구하였는데, 역적 이지용이 임금에게 아뢰지 않고 또 외부의 관료와 협의도 하지 않는 채 마음대로 조인(調印)하여 양도하였다.
당시의 여론이 들끓고 각 공동모임이 크게 일어나 원세형(元世亨) 등 수천 명이 모여서 외부로 들어가 역적 이지용을 밟아 죽이려고 하자, 이지용이 담장을 넘어 도망갔다. 나는 마침 그날 하루 밤낮을 직숙(直宿)하는 날이기에 직접 볼 수 있었다. 그가 백성들에게 곤욕을 당한 상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대체로 우리나라가 타국에 영토를 넘겨주는 것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어찌 매국노의 우두머리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