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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을미년(1895, 고종 32)

유길준(兪吉濬)이 내부대신이 되어 강제로 협박하는 일이 많았다. 심지어 최면암(崔勉菴, 최익현)을 잡아올려 그와 더불어 일을 하려고 하였는데, 최공(崔公)이 죽을지언정 따르지 않겠다고 맹세하여 한갓 모욕만 당하고 떠났다.

학자인 전우(田愚), 김병창(金秉昌), 정윤영(鄭允永) 등을 모두 음직에 차임하여 유학(儒學)을 존숭한다는 명분을 차지하였다. 당시 내외의 상황으로 인하여 속으로 해치면서 겉으로 임금의 위호(位號)를 존숭하여 대군주(大君主)로 올리고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관제(官制)를 고쳤다. 연조문(延詔門)을 허물고 그 곳에 독립문(獨立門)을 세우고, 삼전도비(三田渡碑)를 묻었다.

박준양(朴準陽), 이태용(李泰容), 한선회(韓善會) 등이 비밀리 모의하던 일이 탄로가 나서 모두 형벌을 받아 죽었다. 이준용(李埈鎔)은 황제의 가까운 친족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이 때 단발령이 매우 혹독하게 시행되었다. 또 의복제도를 고쳐 소매가 긴 옷을 입지 말고 검은 색 두루마기를 입도록 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유인석(柳麟錫)이 의병을 크게 일으켜 충청북도의 관찰사와 수령 몇 명을 죽이고 승승장구하며 충청남도에 진격하여 제일 먼저 단발을 강행했던 천안군수(天安郡守) 김병숙(金炳塾)을 베어죽였다. 전의군수(全義郡守) 이교승(李敎承)도 혹독하게 삭발을 강행한 자였는데, 도주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대흥군수(大興郡守) 구완희(具完熙)가 관군을 출동시켜 토벌하여 물리쳤다. 이로써 호서 지역의 상처가 가장 심하였다. 유인석이 충주성(忠州城)에 들어가서 거점을 잡았지만, 일본군에게 패배하여 달아나 강원도로 간 뒤 함경도를 통해 북간도로 들어갔다.

8월에 이르러 국적(國賊)이 일본군의 손을 빌려 벌떼처럼 일어나 모여서 대궐에 들어가 곧장 시어소(侍御所)를 침범하였다. 궁내부대신 이경식(李畊植)과 연대장 홍계훈(洪啓薰)이 제일 먼저 피살되었고, 이어서 내전(內殿)을 포위하고 곤모(坤母, 명성황후)를 독살로 시해하고 후원에서 그 시신을 불태웠다. 대전(大殿) 역시 빙 둘러싸서 물샐틈없이 포위하였다. 교지(敎旨)를 사칭하여 왕비 민씨를 폐위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종묘에 이를 고하고 국중(國中)에 반포하였다. 총리대신 김홍집, 내부대신 유길준, 외부대신 김윤식, 탁지부대신 어윤중,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조희연(趙羲淵), 법부대신 장박(張博), 농부대신 정병하(鄭秉夏)가 모두 연서(聯署)하였다.

궁내부 시종 임최수(林最洙)와 전(前) 참령(參領) 이도철(李道澈)이 나라의 원수를 복수하고자 하여 의사(義士)를 모집하니 거의 백여 명이었다. 동별영 대장(東別營隊長) 남만리(南萬里)의 군사 8백여 명을 빌려 장차 대궐에 들어가 일본군을 축출하고 나라의 역적을 붙잡아 죽이려고 하였다. 함께 일을 계획한 이민굉(李敏宏)이 궐문 파수장(把守將) 이진호(李軫鎬)와 함께 모월 모일에 태화궁(太和宮) 후문을 열어 의병을 들어오게 밀약하였는데, 이진호가 겉으로 약속하고는 속으로 배반하였다. 미리 적군을 궐문 내에 배치하여 총으로 의병을 쏘아 사살하였다. 임최수와 이도철 두 분은 사로잡혀 적을 욕하면서 죽었다. 훗날 충민(忠慜)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홍주(洪州)의 신사(紳士) 김복한(金福漢), 이설(李偰), 김상덕(金商悳) 등은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을 들어가 점거하니 앞으로 큰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목사(牧使) 이승우(李勝宇)가 길을 바꾸고 머리털을 바싹 깎고 상경(上京)하였다. 그런데 의병이 관군을 본 후로부터 모두 해산하여 김복한과 이설 두 사람은 붙잡혀 함거(檻車 : 죄인을 실어 나르던 수레)로 상경하여 감옥에 있다가 다행히 죽음을 면하였다. 그리고 김상덕은 도주하여 살아났다.

정산(定山)의 재신(宰臣) 민종식(閔宗植)이 예산(禮山)의 신사(紳士) 이남규(李南珪)와 함께 의병을 일으킬 거사를 계획하였다가 이루지 못하였다. 민종식은 붙잡혀 정배(定配)되어 목숨이 살았고, 이남규는 일본병사에게 살해를 당하였다. 총리대신 김홍집이 국사를 전적으로 주도하고 임금의 권한을 협박하여 임금과 가까운 신하들을 많이 죽이고 오로지 일본을 추종하는 당파 및 소론(少論)을 등용하여 300여 군(郡)의 수령이 순전히 소론 당파였다. 이를 비판하는 사람이 많았다. 사람이 이와 같으니 어찌 국가를 개혁하고 문명을 진보할 수 있겠는가.

얼마 되지 않아서 이범진과 이완용이 몰래 러시아 공사를 추종하였다가 어느 날 밤에 대군주(大君主)를 모시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였다. 이에 군주의 권한이 다시 회복되고 이범진과 이완용이 국정을 주도하였다. 김홍집과 농부대신 이병하(鄭秉夏)가 죽고, 탁지부대신 어윤중은 달아나다가 길에서 혐의스런 사람들을 만나 피살되었다. 외부대신 김윤식은 제주로 유배형을 당하였다. 전(前) 판서 이승오(李承五)는 왕비 민씨를 폐위할 적에 종묘에 고유(告由)하였던 관원으로 참여하였기에 멀리 유배형에 처해졌다. 내부대신 유길준, 군부대신 조희연(趙羲淵), 법부대신 장석주(張錫周), 학부대신 □□□(원문결락), 경무사(警務使) 안경수(安駉壽) 및 권형진(權瀅鎭) 이하 일본을 추종하는 당파가 모두 일본으로 달아났다.

의정부 이하가 모두 환국(換局)되었다. 러시아 공사관의 통역관 김홍육(金鴻陸)은 임금의 총애를 많이 받아 국정에 간여하여 대소 관료들이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는 훗날 흉악한 계획을 세워 형벌을 받고 죽음을 당하였다.-

러시아 공관 옆에 새 궁궐을 세우고 -이전 경운궁(慶運宮) 옛 터-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고치고, 황제의 지위에 나아가고 광무(光武)라는 연호로 바꾸고, 또 관제를 개혁하고 원구단(圜邱壇)을 쌓아 상제(上帝)에 제사를 올리고 왕비 민씨의 지위를 회복시켜 황후로 추숭하고, 휘호(徽號)를 ‘명성(明成)’이라고 올리고 홍릉(洪陵)에 장사를 지냈다. 세자(世子)를 태자(太子)로 삼고, 세자빈(世子嬪)을 태자비(太子妃)로 삼으며 휘호를 ‘순명(純明)’으로 올리고 강헌대왕(康憲大王)을 추숭하여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라고 하였다. 사조(四祖)를 황제로 추숭하였다. 대왕대비 조씨의 휘호를 신정태후(神貞太后)로, 왕대비 홍씨의 휘호를 명헌태후(明憲太后)로 올렸다. 이러한 일을 종묘에 고하고 사면령을 내렸다.
당시 여러 선비들의 새로운 모임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는데, 민권당(民權黨)이라고 칭하면서 독립협회(獨立協會)라고 이름 하였다. 수천 명이 종로 및 궐문 밖에서 모여 연설하고 토론하였는데 윤리강상을 멸시하고 임금과 어버이를 무시하는 일이 아님이 없었다.

밤낮으로 소란을 피우고 각 대신의 가택을 부수는 등 그 행동이 못하는 짓이 없을 정도였다. 임금이 대안문(大安門)에 임어하여 모인 사람들에게 선유(宣諭)하였지만, 이를 준행하지 않고 더욱 창궐하였다. 보부상 길영수(吉永洙)란 자가 상무회(商務會)를 만들어 패랭이를 쓰고 몽둥이를 지니고 독립협회를 반대하니, 도성에 큰 소란이 일어나고 독립협회가 드디어 축소되었다.
마침내 중추원(中樞院)을 설치하여 언관(言官)의 중추기관으로 삼았는데, 정부당(政府黨)에서 20인, 독립협회당에서 20인씩 나누어 의관(議官)을 제수하고 의장(議長)이 관할하게 하였다. 그 원규(院規)에 따라 대신(大臣) 후보자를 정부에 추천할 때에 이르러서 독립협회당이 박영효를 투표하여 사적으로 정부에 통첩(通牒)하자, 정부당(政府黨)에서는 원장 이하가 모두 꾸짖으며 사직하고 물러갔다. 그러나 임금이 엄한 명령을 내려 독립협회당을 축출하고 정부당을 불러들여 중추원의 정무를 실시하니, 매우 자치(自治)의 효험이 있었다. 하지만 상신(相臣) 윤용선(尹容善)이 그 언로를 꺼려서 폐지하도록 아뢰었다. 이와 같은 상신이 있었으니 나라가 잘 다스려질 수 있겠는가.

상신 윤용선이 문선왕묘(文宣王廟)의 축문(祝文)에 의당 어휘(御諱)를 삭제하고 또 감(敢)자를 삭제하도록 주청하니, 임금이 이 주청을 따랐다. 이는 황제는 소왕(素王)에게 비굴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니, 이 어찌 말이 되겠는가. 예부터 제왕이 성인을 존숭하는 것으로 공경을 삼았으니, 스승의 도리에 입각하여 섬긴 것이다. 저 글을 읽는 유자(儒子)라는 자가 도리어 성사(聖師)를 폄하하니, 이는 사문(師門)의 죄인이 아니겠는가?
또 장조(莊祖, 사도세자의 존호)를 추숭할 때에 진종(眞宗)으로 부조묘(附祧廟)를 삼았으니, 이는 영조(英祖)와 정조(正祖)의 죄인이다. 만약 두 능(陵, 영조와 정조)의 혼령께서 이를 아신다면 그 책임은 장차 어디에 돌아가겠는가. 이른바 상신(相臣)이 된 자가 나라의 예법을 문란시켜 이처럼 잘못한 행위는 죽이더라도 애석하지 않을 것이다.
이 때 궁인(宮人) 엄씨(嚴氏)가 빈(嬪)으로 올랐다가 비(妣)로 다시 올랐다. 임금의 총애를 크게 받아 왕자 영친왕(英親王)을 낳는 후에 영친왕이 황태자(皇太子)에 책봉되어 엄씨 집안이 번창하고 정권이 대부분 그쪽으로 돌아갔다. 또 별시위(別入侍, 국왕의 내전에 자유로이 출입하고 알현이 허락된 자)라는 명칭이 새로 생겨났다. 그래서 시골의 잡된 술수를 지닌 자와 천민 창우(倡優) 및 하찮은 자들이 궁인과 환관을 등에 엎고 마구 진출하여 아양을 떨어 모두 요직을 얻었다. 또 매관매직의 길이 다시 열려 관찰사와 수령을 사고파는 것이 마치 장사꾼이 이익을 꾀하는 것과 같았다. 백성을 학대하고 재물을 축적하여 먼저 그 본전을 챙기고 끝내는 뇌물 꾸러미를 채웠다.

각부대신(各部大臣) 역시 소속 관원의 자리를 팔아먹는 자가 많았다. 오직 이도재(李道宰)와 심상훈(沈相薰)만은 이 풍조에 물들지 않았다. 공사청(公使廳, 公事廳)의 총애 받는 환관 강석호(姜錫鎬)와 나세환(羅世煥)이 관직을 팔아먹는 거간꾼으로 모두 거부(巨富)가 되었다. 또 경무청(警衛廳)을 설치하였는데, 총관(摠管) 이근택(李根澤)이 마치 함정을 파고 사람들을 몰아 재물을 강제로 탈취한 것이 거의 수만 관(貫)이 되었다.

주석
연조문(延詔門) 연조문은 영은문(迎恩門)을 가리킨다. 원래 명나라 때에는 연조문이라고 불렸고, 청나라 이후에는 영은문으로 고쳐 불렀다.
소왕(素王) 공자(孔子)를 실제 제왕의 지위를 얻는 것은 아니지만 제왕의 덕을 지녔다고 하여 일컫는 말이다.
부조묘(附祧廟) 불조묘(不祧廟)의 잘못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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