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1894, 고종 31)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 장흥부사 이용태(李容泰), 전운사(轉運使) 조필영(趙弼永),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 등이 탐욕스럽게 백성을 학대하였기 때문에 민란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조정은 탐관오리를 죄주지 않고 난민(亂民)만을 치죄하여 백성들이 모두 동학으로 들어갔다. 그 우두머리 전봉준이란 자가 난민을 모아 당을 만들어 호남 전 지역에서 창궐하였다. 조정에서는 군병을 출동시켜 토벌하였다.
대장 홍계훈(洪啓薰)은 -예전의 이름은 재희(在羲)였다- 괴수를 섬멸하여 화란의 뿌리를 뽑지 못하고 단지 그 편장(偏將) 이학승(李學承)만을 꺾고 경솔히 군사를 되돌렸다. 이에 역적이 곧 다시 크게 기병(起兵)하여 각 군을 소탕하고 승승장구 진격하여 전주성에 들어가 거점으로 삼고 스스로 국호(國號)를 세우고 자칭 왕호(王號)를 사용하였다. 감사 김문현 이하는 모두 달아났다. 묘당(廟堂)에서 역적을 토벌하는 방책을 논의할 적에 대신 김홍집이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자고 아뢰니, 임금이 그 술수에 빠져 주청을 윤허하였다.
청나라 장졸(將卒) 3천명이 나와 아산(牙山)에 상륙하여 주둔하였다. 군율이 엄격하지 않아 군사들이 마을을 마구 돌아다녀서 작폐가 매우 심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걱정하고 두려워하였다. 당시 일본 역시 군병을 출동시켜 -만국공법에 어느 한 나라가 병력을 움직이면 각국이 모두 병력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하였다. 구미(歐美) 여러 나라가 병력을 출동시키지 않았는데 일본만 군병을 동원하니 특별히 다른 뜻이 있는 것이다- 일본군은 곧장 경성으로 들어가 도성 남산에 유진(留陣)하였다. 일본공사 오오토리게이스케(大鳥圭介)가 임금을 알현하고서 청나라를 배격하고 자주(自主)하라고 권고하였다.
조야(朝野)의 여론은 당랑거철(螗螂拒轍)이라고 인식하고 허겁지겁 놀라 흩어졌다. 경성 사람 중 고향으로 피란하여 온 사람이 많았다. 나 역시 고향집(충청도 아산)으로 내려왔다. 며칠이 되지 않아 일본공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입궐하여 ‘독립(獨立)’이라는 명분으로 위협하니, 임금이 부득이 이를 따랐다. 당시 경성에 사는 명문대가의 가족들이 모두 피란하여 도성을 빠져나갔고 인심이 들끓었다. 일본병사가 곧 청나라 병사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청나라 공사(公使) 원세개가 전투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본국으로 되돌아가려고 하였다. 일본 병사가 아산에 와서 청나라 병사와 접전하려고 하였다. 청나라 군대는 하루 전날 직산(稷山)과 성환(成歡) 등지로 진을 옮겼다. 그 때문에 일본군은 길을 나누어서 진격하여, 한 부대가 성환에 가서 청나라 군대와 접전하였다. 청나라 군대는 공주로 패주하였다가 돌아서 충주로 가고 다시 관동(關東)과 함경북도로 갔다.
또 다른 일본군 부대는 아산으로 갔다. 가서 보니 성안이 텅 비어 있어 군(郡)의 수령을 찾았다. 아산현감 정인진(鄭寅鎭)은 바로 호남의 미천한 출신이었는데, 어의(御醫)로서 총애를 받아 지방 수령이 된 자이다. 그는 일본군이 오는 것에 겁을 먹고 우리 집으로 도망쳐 왔다. 선친께서 성을 버리고 온 허물을 질책한 뒤 다시 군(郡)으로 복귀할 것을 적극 권하여 돌려보냈다.
그런데 현감 정인진은 중도에서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 그 다음날 일본군의 한 부대가 와서 우리 집을 에워싸고 현감을 수색하였다. 현감을 찾지 못하자 선친을 붙잡고 강제로 현감을 찾아내도록 협박하며 총칼을 막 휘두를 지경에 이르렀다. 너무 황급하여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나는 하루만 기한을 달라고 간청하고 집안의 머슴과 마을사람들을 데리고 사방으로 도망친 현감을 뒤쫓아 갔다. 6~70리쯤 이르러 비로소 그를 만나 집으로 데리고 오니, 일본군은 선친을 붙잡아가다가 중도에서 풀어주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정현감은 우리 집에 유숙하였다가 다음날 군에 들어가니, 일본군이 이미 철수하고 경성으로 뒤돌아간 뒤였다. 정현감 역시 안전하였다.
나는 발이 부르트고 다리에 병이 나고 피부에 종기가 나서 치료한 지 여러 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았다. 지금 이 난리는 다른 사람은 겪지 않았고 나만이 당했던 액운이었다. 일본군이 벌써 대전과 직산 등지에서 승리하고 또 평양으로 가서 청나라 군사와 접전하였고 수개월 후 의주에서 연승하여 청나라 군사가 마침내 패주하여 압록강을 건너 달아났다.
이 때 동비(東匪)의 난리가 크게 일어나 전국이 떠들썩하였다. 지방의 수령이 이를 제재하지 못하였다. 오직 홍주목사 이승우(李勝宇)와 나주목사 민종렬(閔種烈)만이 관군을 출병하여 토벌하고 퇴각시켜, 동학의 무리들이 그 경내를 들어갈 수 없었다. 기타 여러 군(郡)의 각처에는 개미나 벌처럼 진을 치고 모여서 원근과 관계없이 마음대로 다니며 토색질을 하였다. 우리 집이 매번 그 토색질을 먼저 당하였는데, 날마다 떼를 지어 와서 말(馬)을 탈취하고 돈을 요구하는 등 그들의 요구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동학이 점차 퍼지는 것이 기름이 종이를 차츰 적시는 것과 같았다. 우리 고장 백성들이 모두 동학의 교적(敎籍)에 들어가, 양반가의 분묘가 강제로 파헤쳐지는 일이 많았다. 전에 조금이라도 원한이 있는 자는 귀하고 천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두 포박하여 형벌을 가하고 돈과 곡식을 협박하여 탈취하였다. 이는 강도의 행위보다도 심하였다.
또 밤중에 떼로 아산읍에 들어가 군수 양재건(梁在謇)을 포박하여 장차 총살하려고 하였다. 양재건이 힘과 근력이 매우 뛰어나 포박을 풀고 담장을 넘어 재빨리 달아났다. 다행히도 총에 맞지 않아 죽지 않았다. 그 무리들은 군기(軍器)와 화약(火藥)만을 탈취하고 떠났다. 그 소란으로 인하여 바늘방석에 앉아있는 것과 같아 침식이 불안하였다. 우리 집안은 원래부터 남의 땅에 강제로 분묘를 쓰거나 산소를 강탈한 적이 없었고, 또 다른 사람의 재산을 빼앗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친족의 집들 중에는 이러한 일이 있었다. 그 때문에 그 상놈들이 우리 집을 주권(主權)이 있는 집으로 칭탁하여 돈과 곡식을 마음대로 징수한 것이 마치 이전에 포리(逋吏)가 족징(族徵)하는 것과 같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동민(洞民)과 청지기[廊漢]가 모두 적국(敵國)이 되고 노비는 모두 배반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노비문서를 찾아내 불태우고 모두 풀어주어 면천(免賤)하였다. 물을 길고 장작을 패는 등의 일을 내가 직접 해서 밥을 지었다.
경군(京軍)이 내려와서 토벌할 때에 종종 동비(東匪)와 교전하였는데, 갑자기 어느 날 한 무리의 군사들이 와서 우리 집을 몇 겹으로 포위하고 총을 발사하여 진짜 군사인지 혹 가짜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황급히 문으로 나와 보니 바로 경군이었다. 그 군사 중에는 일찍이 얼굴을 아는 자가 있었다. 그가 몸을 숙이고 문안하기를, “이 근처에 동학도 우두머리가 있다고 하여 붙잡으려고 왔는데 귀댁(貴宅)이 이곳에 계신지 몰랐습니다. 이 때문에 함부로 와서 놀라게 하였으니 매우 미안합니다”라고 말하고서 떠났다.
이웃에 사는 이영도(李永道)라는 자가 있었는데, 평소 교활하고 악한 자로 우리 집의 행랑채에 의지하며 살아가던 자였다. 동학에 입교한 이후 접주(接主)라고 칭하였다. 동료들을 유인하여 우리 집을 음해한 것이 적지 않았다. 이제 경군이 내려오자 죽을까 두려워 내당(內堂)의 처마 아래에 숨어서 놀란 개나 상처 입는 새처럼 벌벌 떨었다. 그의 죄상을 따지자면 병정에게 내어주어야 하지만 우리 집안이 평소 음덕을 쌓는 것을 선대부터 지켜온 모범으로 삼았기 때문에 곧 생명을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을 발휘하여 직접 그 놈을 붙잡아서 내방(內房)의 벽 속에 넣어두었다가 관군이 포위를 풀고 떠난 후 밤을 타서 풀어주어 그 목숨을 살려주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뀐 후에 그 놈이 배은망덕할 뿐만 아니라 돈과 곡식을 도둑질하여 착복하고 또 우리 집을 능멸하는 일이 많았다. 세상사란 본디 이와 같다.
청나라 군대가 패주한 이후 일본에 건너갔던 국사범(國事犯)이 모두 귀국하여 군소배들이 농간하고 날뛰어 서로 친밀히 협력하고 머리를 흔들고 눈알을 돌리며 하지 못하는 짓이 없었다. 조정에 가득 차 있는 자는 모두 국적(國賊)이고, 향리에 횡행하는 자는 모두 강도였다. 이즈음 대원군이 또 다시 나왔다가 정권을 잡은 지 몇 달 만에 곧 추출되었다. 박영효(朴泳孝)가 내부대신이 되어 정권을 잡았는데, 모반을 꾀한 자취가 드러나 다시 일본으로 도망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