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사년(1893, 고종 30)
봄에 이른바 동학당(東學黨)으로 어두귀면(魚頭鬼面)한 몇 명이 대궐문 밖에 나와 엎드려 붉은 보자기로 싼 상소문을 올려서 감히 그들의 우두머리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冤)을 청하였다. 이는 나라의 위엄을 멸시하여 한번 시험해보고자 한 것이다. 조정에서는 마땅히 붙잡아 남김없이 죽임으로써 화근을 방지해야 하는데 도외시하여 보통 일로 치부하고 한갓 이익과 권세만을 다투었다. 조정의 정책이 이와 같으니 어찌 오래 보전할 수 있으리오. 동학당이 점차 세력이 커져 보은(報恩)에서 그 무리들이 많이 모여 난리를 일으키고 행패를 부렸다. 정부에서 선유사(宣諭使) 홍계훈(洪啓薰)을 파견하였는데, 이들을 어루만지고 그 악행을 양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