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년(1884, 고종 21)
10월 경성에서 우정국을 신축하여 고관(高官)을 초청하고 큰 연회를 설행하였다. 석양이 질 무렵 무뢰배 10여 명이 갑자기 침입하여 칼로 민영익(閔泳翊)을 찌르고 그 귀를 베었다. 당시 박영효(朴泳孝), 김옥균(金玉均),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서재필(徐載弼) 등 오적(五賊)이 경복궁의 시어소(侍御所)에 들어가서 임금을 위협적인 말로 협박하기를, “현재 우정국에 큰 변란이 발생하여 민영익이 참화를 입었으니 장차 대궐을 범할 우려가 있습니다. 바라건대 속히 파천(播遷)하소서”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임금이 두려워 도보로 북장문(北壯門)을 나오니, 그 무리들이 유인하여 경우궁(景祐宮)에 이르러 가두었다. 물샐 틈이 없이 다섯 역적이 임금 주위를 빙 둘러싸고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를 시켜 온갖 위협과 공갈 협박을 다하였다. 한편으로 교지(敎旨)를 사칭하여 시임(時任) 국무대신(國務大臣) 민태호(閔台鎬) · 조영하(趙寧夏) · 민영목(閔泳穆)과 각 영(各營) 대장(大將) 한규설(韓圭稷) · 윤태준(尹泰駿) · 이조연(李祖淵)을 불러들였다. 생도(生徒) 유혁로(柳赫魯) · 정난교(鄭蘭敎) · 서재창(徐載昌) · 윤치호(尹致昊)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음- 등 10인을 시켜, 각기 예리한 칼을 지니고 궁전 계단 앞에 나열해 있다가 들어올 때마다 한 명씩 찔러 죽이게 하였다. 임금의 지위가 호흡하는 한 순간 사이에 있을 정도로 급박하였다.
청(淸) 나라 장수 원세개(袁世凱)가 하도감(下都監, 훈련도감 본영)에 있었는데, 전주(全州) 문관 이봉구(李鳳九)가 원세개에게 가서 위급함을 구원해야 한다는 뜻으로 설득하였다. 원세개가 깨닫고 군대를 거느리고 속히 담장을 넘어 여러 역적을 도륙하려고 하자 역적들이 모두 달아나서 이현(泥峴)에 있는 일본 공사관에 숨었다. 그리고 그날 밤 인천으로 가서 군함을 타고 일본으로 가서 생명을 보전하였다.
유독 홍영식(洪英植)만은 망령되게 임금의 보살핌을 믿고 용서해 줄 것이라고 희망하였다. 그래서 임금을 모시고 북묘(北廟)에 가서 사면해 달라고 간청하였지만, 임금이 그를 벽장 속에 가두었다가 내어 사법관에게 넘기자, 도성의 백성들이 마구 찔러 죽였다. 생도 몇 명 역시 붙잡혀 능치처참을 당하였다. 윗사람을 범하였던 군졸도 다 죽임을 당하였다. -홍영식이 교지를 사칭하여 영상(領相)으로 삼는 자- 도성 안이 큰 혼란에 빠져 사람들이 황급히 달아나 피신하였다.
대왕대비 조씨, 대비 홍씨, 중궁전 민씨, 왕세자 사궁(四宮)이 보교(步轎)를 타고 바삐 동소문(東小門) 밖으로 나갔지만, 어디로 향해 가야 할지 몰랐다. 원임(原任) 장신(將臣) 이경하(李景夏)가 나이가 들어 각심사(覺心社)에 은퇴하여 살고 있었는데, 사전(四殿, 대왕대비 조씨, 대비 홍씨, 중궁전 민씨, 왕세자)이 가까운 곳에 파천(播遷)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가서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와서 음식과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이경하의 서자 이범진(李範晉)이 도성 안에서 피란하다가 사전(四殿)이 부친의 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서 모셨다. 이범진이 직접 모시고 궁궐로 돌아온 뒤 아부로 총애를 받아 청요직과 고관으로 크게 등용되어 권세를 크게 휘둘렸고 온 가문이 번창하였다. 이른바 여러 역적의 집을 도성의 백성들이 모두 불을 질러 도성 안이 난장판이 되는 듯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