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년(1882, 고종 19)
6월 오영(五營)의 군졸들이 호조판서 김보현(金輔鉉)과 선혜청 당상 민겸호(閔謙鎬)가 수 개월간 군사의 급료를 지급해 주지 않음으로 인하여 거의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기에 군사들이 모여서 변란을 일으켰다. 수상(首相) 이최응(李最應), 호조판서 김보현, 선혜청 당상 민겸호를 구타해서 죽이고 즉시 궐내로 들어가 중궁전(中宮殿)을 붙잡아 구타하는 등 망극한 행위를 자행했으니, 앞으로 어떤 화가 있을지 예측할 수 없었다. 무예청(武藝廳) 별감(別監) 홍재희(洪在羲)가 말을 둘러대서 중궁전을 빼앗아 등에 업고 건춘문(建春門)으로 나가 화개동(花開洞) 시직(侍直) 윤태준(尹泰駿)의 집에 숨어 있었다. 그 다음날 세마(洗馬) 민응식(閔應植)이 중궁전을 모시고 충주 장호원(壯湖院)에 있는 종제(從弟) 민형식(閔炯植)의 집으로 가서 숨었다.
군란을 일으킨 군사들은 즉시 모여서 운현궁으로 가서 대원군을 모시고 입궐하여 개정(開政, 관리의 임용)하였는데, 대원군은 근정전(勤政殿)에 앉아 교지(敎旨)를 사칭하고 인사행정을 하여 이재면(李載冕)으로 병권을 담당하게 하고 내외의 요직을 모두 총애하는 인물, 남인과 북인으로 제수하였다. 그리고 유배지에 있던 문객(門客)을 사면(赦免)하여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다.
중궁전이 병화(兵禍)를 당해 죽은 모양새로 국휼(國恤)을 반포하고 혼전(魂殿)을 설치하고 신민(臣民)으로 하여금 상복을 입게 하고, 시신이 없이 의대(衣襨)만으로 장례식을 마련하였다. 국장도감(國葬都監)과 산릉도감(山陵都監)을 설치하고 총호사(摠護使), 제조(提調) 이하 각 집사들을 선출하였으니, 그 상황이 가관이었다. 당시 청국의 구원병이 와서 훈련원에 유진(留陣)하였다. 정랑 남정철(南廷哲)이 당시의 일을 도독(都督) 정여창(丁汝昌)과 오장경(吳長慶)에게 알려서 조선 군란의 상황과 가짜 국상(國喪)을 반포한 일을 본국 정부에 보고하자, 대원군을 붙잡아 이송하라고 명한 청나라 황제의 비준이 있었다. 이에 정도독이 대원군과 회담을 청한 뒤 즉시 대원군을 붙잡아 청나라 봉천부(奉天府)로 보냈다가 이어 보정부(保定府)로 옮겨 가두었다.
이에 임금의 권한이 다시 회복되고 중궁전을 충주에서 모셔 오도록 하면서 충청병사 구완식(具完植)에게 호위하게 하였다. 그래서 병사 구완식이 졸지에 군사를 점검하고 행군하였다. 호서 전역의 인심이 크게 요동하고 유언비어가 난무하였으나, 며칠 되지 않아 드디어 잠잠해졌다. 충청병사 구완식은 금장(禁將)에 올랐다. 중궁전의 지위가 다시 안정되어 전 왕실이 예전처럼 기뻐하게 되었다. 그리고 경과(慶科)를 설행하고 사면령을 내렸다. 민응식(閔應植), 윤태준(尹泰俊), 홍재희(洪在羲), 남정철(南廷哲)을 모두 등용하였다.
북도인(北道人) 이용익(李容翊)이 하루에 천리길을 가는 보술(步術)이 있었는데, 봉서(封書)를 가지고 왕래한 공로가 있어 양성현감(陽城縣監)으로 삼았다. 그밖에 공로에 상을 하사받는 사람이 많았다. 그 동안 4, 5개월간의 난리는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군란 이후 경성에 거주한 사람 중 난리를 피해 낙향하려고 황급히 달아났다가 갈 곳을 몰라서 평소 친분이 전혀 없는 집에까지 거처한 사람이 많았다.
당시 청나라에 추종한 사람 중 등용된 자가 많았다. 청국 사신으로 한 번 천진(天津)에 갔다가 돌아오면 모두 좋은 벼슬과 높은 관직을 얻을 수 있었기에, 당시 사람들이 이를 청당(淸黨)이라고 지목하였다. 또 청나라 병사와 상인의 기염이 하늘을 찌를 듯하여 패악한 짓을 자행하며 우리나라 사람을 노예처럼 무시하고 수없이 다치게 하거나 살해하였다. 심지어 장신(將臣)이 욕을 당하고 명사(名士)가 결박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국가의 형세가 위태로워 불쌍하였지만, 이 모든 수모는 스스로 초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