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술년(1874, 고종 11)
황태자가 탄생하여 조야(朝野)에서 칭경(稱慶)하고 나라에 사면령을 크게 내리고 증광시(增廣試)를 설시하여 취사(取士)하였다. 화기(和氣)를 맞아 저궁(儲宮, 황태자)의 무궁한 복록을 기원하는 일을 급선무로 삼고 무녀와 술객(術客)을 뽑으니, 이들이 궐내에 가득 찼다. 북 치는 소리가 내전(內殿)에서 끊이질 않았고 척전법(擲錢法)으로 길흉화복을 점치는 술수가 궐문 밖에 어지럽게 진설되었다. 그들은 모두 초무(楚巫, 무당)와 당거(唐擧)로서 과거와 미래를 알고 흉한 일을 피하고 길조를 성취하도록 하였다. 또 벼슬아치 중에 홍승지(洪承旨)의 신령스러운 경전과 정참판(鄭參判)의 총령(叢鈴)이 있었다.
마침내 이궁(離宮), 별관(別館), 음사(淫祠), 불우(佛宇, 사찰)를 팔도 명산에 세운 것이 천 백여 군데나 되었다. 날마다 달마다 기도를 올렸는데 그 비용은 모두 관찰사나 수령의 자리를 매입(賣入)하는 것과 향민(鄕民)의 부호(富戶)에게 관직을 강제로 팔아먹는 수입에서 나온 것이다. 또 취렴(聚斂)하는 신하로 하여금 백성의 전토와 곡식을 빼앗게 하고, 산해(山海)의 잡세를 새로 책정하였다. 광산을 개척하여 금은(金銀)을 채굴하고 선박을 관리하여 어염세(魚鹽稅)를 거둔 것이 모두 거대한 재화였는데, 이를 내장원(內藏院)에 저장해 놓고 무함(巫咸)으로 하여금 이를 강귀신에게 던져 주게하고 곤명(昆命)으로 하여금 이를 산귀신에게 던져 주게 하였다.
왕세자에게 경서를 강론하는 서연(書筵)의 경우 사부(師傅)와 보양(輔養)하는 관원을 헛되이 설치만 하고 글을 읽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탄식을 견딜 수 있겠는가? 이 때 뜻있는 선비 홍재학(洪在鶴)과 백낙관(白樂寬) 등 여러 사람들이 상소문을 올려 직간(直諫)하였다가 죽임을 당한 자가 많았다. 홍재학이 참형을 당할 적에 수레바퀴가 부러지고 우레와 지진이 크게 일어났다. 하늘의 경계하심이 이와 같은데 오히려 살피지 못하였으니, 이 역시 운명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