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유년(1873, 고종 10)
문신 최익현(崔益鉉)이 시정(時政)의 큰 잘못을 나열한 상소는 수 천마디였고, 여러 조목으로 진술한 내용은 바로 화폐를 이정(釐正)할 것, 문세(門貰)를 폐지할 것, 만동묘(萬東廟)를 복설(復設)할 것, 사흉(四凶)의 관작을 추삭(追削)할 것, 종실(宗室)의 끊어진 대를 제대로 입후할 것 등이었다. 기타 논한 내용도 모두 바르고 강직한 말이었다. 그 때문에 임금이 가납(嘉納)하여 등용하려고 하자, 사헌부와 사간원이 합계(合啓)하여 크게 반발하였다. -당시 간관(諫官)은 모두 남인이었다.- 영상 홍순목(洪淳穆)이 야대(夜對, 왕이 밤중에 신하를 불러 베푸는 경연)에서 최익현에게 벌을 내려 죽이도록 청하는 지경에 이르자, 임금은 부득이 최익현을 제주로 유배를 보냈다. 당시 최공(崔公, 최익현)의 명성이 치솟아 온 나라가 우러러 보았는데, 기호(畿湖) 지역의 선비들은 모두 길가에 기다렸다가 큰 절을 올렸으며, 또 유배지까지 따라간 사람이 많았다.
경향의 사림(士林)이 소청(疏廳)을 설치하고 계속 황묘(皇廟, 만동묘)를 다시 세울 것, 사흉(四凶)을 추율(追律)할 것, 아울러 -원문 결락- 호전(胡錢)을 폐지하고 상평통보를 사용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대원군이 국정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곤전(坤殿, 명성황후)의 친동생 민승호(閔升鎬)와 왕대비의 친조카 조영하(趙寧夏)와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이 함께 국정을 주도하였다. 그런데 1년이 채 되지 않아서 민승호가 소사(燒死)하자 여러 민씨들이 번갈아 세도(世道)를 장악하여 어지러운 정사가 이전 사례보다 심하였다. 병권(兵權)과 재부(財府), 큰 고을과 군현이 모두 민씨 집안의 물건이 되었고, 금마옥당(金馬玉堂)이 모두 다 사냥개처럼 끌고 매처럼 부리던 외척의 빈객들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사내아이를 낳으면 민씨 집안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고 生子願爲閔家壻 딸아이를 낳으면 민씨 집안의 며느리가 되기를 원하네 生女願爲閔家婦
나라 사람들이 이처럼 질시하였으니, 어찌 오랫동안 복록을 누릴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갑을(甲乙)의 난리를 초래한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