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년(1866, 고종 3)
서양 배가 강화도에 침입하여 성(城)을 함락시키자, 유수(留守) 이인기(李寅夔), 중군(中軍) 이용회(李龍會), 통진부사(通津府使) 이공렴(李公濂)이 경성으로 달아났다. 조정에서는 대규모로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려고 이경하(李景夏)를 순무대장(巡撫大將), 이용희(李容熙)를 중군(中軍), 양헌수(梁憲洙)를 천총(千摠)으로 삼았으나, 대장이 경성에 있으면서 행군(行軍)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군과 천총이 주장(主將)을 대신, 명령을 주관하여 나아가 통진에 진을 쳤다. 천총이 강화도 삼랑성(三郞城)에서 전투를 벌이니, 서양의 군사들이 퇴각하였다.
그때 경성에는 큰 소동이 일어나 가족을 데리고 시골로 피난하려고 내려가는 사람들이 길가에 가득 차서 경성이 거의 텅 빌 정도였다. 시골 사람들도 두려워서 달아나 재산을 내버려둔 채 산으로 들어간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전국이 들썩거리고 안정되지 않았다. 다행히 저 서양 배가 물러남으로 인하여 난리가 드디어 조용해졌다. 강화유수 이인기에게는 죄를 내려 멀리 유배를 보냈고, 이용희는 형조판서로 삼고, 양헌수는 한성좌윤으로 삼았다. 전승비(勝戰碑)를 삼랑성 아래에 세우고 승전과(勝戰科)를 춘당대(春塘臺)에 설시하여 문 · 무사(文武士)를 시취(試取)하였다.
이 때 서양 배가 평양에 침입하였는데 강물의 수위가 낮아져 함몰되었다. ≪독일 출신 오페르트 일행은≫ 충청도 덕산(德山) 구만포(九萬浦)에 가서 뭍에 오른 즉시 가야동(伽倻洞)으로 가서 화포(火炮)를 파묻고 남연군(南延君)의 묘소를 파헤쳤다. 이 때문에 관서(關西)와 호서(湖西)의 여러 군(郡)에서 큰 소동이 일어나 또다시 난리가 한 번 일어났다. 이에 앞서 대원군이 포도대장 이경하(李景夏)를 시켜 수만 명의 천주교인을 붙잡아 죽이자, 천주교인이 대원군에게 원한을 품고 서양인을 인도하여 대원군의 부모 묘소를 파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