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재집(確齋集) 권8』,「각중만록(閣中謾錄)』「경난록(經亂錄)」(외부로 노출하지 말라)
대개 사람이 태어나 다행히 태평성대를 만나게 되면 전란(戰亂)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재질과 기품의 우열에 따라 훌륭한 사람은 나라에 쓰이고, 중간인 자는 가정에 쓰이고, 아래인 자는 늙어 죽을 때까지 농사일을 한다. 생각하려고도하지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밥이나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리며 풍년을 즐기는 것은 이 모두 일민(逸民)이 누릴 완전한 복이다. 아, 나는 천부적으로 운명이 기박하여 혼란한 시대에 태어나고 혼란한 시대에 성장하였으며 혼란한 시대에 늙었다가 마침내 차마 볼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을 만났으니, 어찌 이 지경에 이르러 시종 한결같이 매우 어지럽고 무서운 세상 한가운데에서 벗어날 수 없단 말인가. 이전 시대 사람의 이른바 ‘좋지 않은 시대에 태어났다’는 탄식은 실로 나를 위해 준비해 둔 말이다.
우리 조선은 중엽 이후 100여 년 동안 전란을 겪지 않고 나라가 태평하여 아무 일이 없었다. 내가 태어난 해부터 난리의 서막이 시작되었으니, 바로 임술년(1862, 철종 13) 나무꾼[樵軍]의 난리이다. 이 난리의 원인은 삼남(三南) 지역의 수령들이 백성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오로지 탐욕만을 부려 백성들이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남(嶺南) 영해군(寧海郡)에서 시작해 나무꾼과 목동들이 각자 몽둥이를 들고 누런 두건을 머리에 두르고 수천 명이 일제히 봉기하여 제일 먼저 부사(府使) 이정(李
여러 지역의 군수들이 모두 도망가고 토호(土豪)와 양반가문이 모두 공격을 받아 파산하였다. 이런 난리가 충청도 영동(永同), 옥천(沃川), 문의(文義) 지역까지 이르렀다. 경군(京軍)과 지방대(地方隊)가 봉기한 백성을 토벌하여 해산시키자 난리가 비로소 진정되었다. 조정에서는 영해부사 이정이 난리에 절개를 지키다가 죽은 것을 기리기 위해 충민공(忠愍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려주었다. 그리고 난리의 우두머리를 효수(梟首)하였다.
상신(相臣) 조두순(趙斗淳)이 ≪시국을≫ 바로잡을 방도를 임금께 아뢰니, 임금께서 삼정(三政)에 관한 올바른 정책을 제출하라고 하여 경향(京鄕)에 포유(布諭)하고 구언(求言)하자, 경륜이 있는 선비들이 치안(治安)하는 방도를 글로 지어서 많이 올렸다. 그렇지만 조정은 형식적인 문구(文具)로만 돌리고 하나도 채택하지 않았으니, 이 어찌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해야 하는 조정의 정책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