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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1895년[乙未]

1월[正月]

국가에서 새 달력을 반포하였는데 청나라 연호를 삭제하고 ‘대조선 개국 504년(大朝鮮開國五百四年)’이라고 칭하였다. 이는 왜인의 달력을 따른 것이다. 왜인의 달력은 제일 먼저 ‘대일본 개국 몇 년’이라고 적었다. 나라의 제도가 혹 일본법을 따른 것이 있었는데 의복제도 역시 저들의 제도를 따랐다. 그렇지만 사민(士民)들은 대부분 따르지 않았다.

초1일

아침에 안개가 있어 흐렸다가 다시 맑아졌다. 나는 후동(後洞)에 가서 성묘하고 돌아왔다. 밤에 비가 조금 내렸다.

초2일

바람이 계속 불고 눈이 내렸다. 주암(舟岩)에 심부름꾼을 보냈다. 이때 가친이 주암에 계시면서 새해를 맞이하였다.

초4일

맑음. 조금 눈이 내렸다.

초5일

맑음.

초6일

맑음. 밤이 되자 비가 내리고 눈이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 바라보니 1자 정도 눈이 내렸다.

초7일

큰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었다.

초8일

맑음.

초9일

맑음. 나는 한질(寒疾)로 며칠 동안 신음하다가 오늘에서야 몸이 회복되었다.

초 10일

입춘. 흐렸다가 햇볕이 났다. 아우가 셋째 숙부님을 모시고 주암(舟岩)에 갔다. 저물녘에 가친이 돌아왔다. 밤이 되자 눈이 내렸다.

11일

맑음.

12일

맑음.

13일

아침에 안개가 있다가 아침이 지나자 해가 나왔다.

14일

맑음.

15일

맑음. 가친이 원천(元川)에 행차하였다가 저물녘에 돌아오셨다.

16일

비가 내려 논과 밭도랑에 물이 넘실거렸다. 오후에 날씨가 쾌청하였다.

17일

맑음.

18일

맑음. 왜병 수백 명이 본부에서 와서 번암원(番岩院)에 묵었다. 방수막(防守幕)을 다 불태우고 부녀자를 찾아내는 등 잔학한 행위가 더욱 심하였다.

19일

맑음.

20일

흐렸다가 맑음. 밤에는 비가 조금 내렸다.

21일

비가 내리고 또 바람이 불었다.

22일

개임. 양수정(兩水亭)에서 출발해 구룡치(九龍峙)를 넘어 안기(安基)에 유숙하였다.

23일

맑음. 가치(加峙) 족인(族人)을 조문하고 운성(雲城)에서 와서 저녁에 주암(舟岩)에 도착하여 우거하였다. 밤에 바람이 계속 불고 또 비가 내렸다.

24일

비가 조금 내리다가 오후에 개었다.

25일

맑음. 아우가 귀근하였다. 오후에 큰 눈이 내려 한 밤중에 몇 자정도 눈이 쌓였다.

26일

눈이 내리고 계속 바람이 불고 세찼다.

27일

눈이 내리고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28일

맑음.

29일

오후에 비가 내리고 눈이 내렸다.

30일

맑음. 이보다 앞서 영남의 사민(士民)들이 왜적을 배척하는 내용으로 각 읍에 통문을 돌려 알렸다. 왜놈이 통문의 내용을 보고서 곧바로 경상감영에 가서 관찰사를 협박하여 무력을 과시하며 성을 함락시키려는 행동을 보였다. 영남관찰사는 두려워서 상주 선비들이 모여 있는 곳에 전령을 보내 의병을 해산하도록 알렸다고 한다.

주석
대조선 개국 504년(大朝鮮開國五百四年) 1894년 갑오년부터 중국의 연호를 쓰지 않고 조선조 개국 시기를 따져 쓰기로 결정해 개국 503년으로 사용했는데 그 다음해인 을미년은 504년이다. 1896년부터 독자적 연호인 건양(建陽) 광무(光武) 등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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