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十二月]
초1일
바람이 세차게 불고 눈이 조금 내렸다.
초2일
맑음. 오늘은 내가 태어난 날이다. 어버이와 멀리 떨어져 지내고 있으니 슬픈 소회를 가눌 수가 없다.
경병과 일본병사 수백 명이 장수(長水)에서 북치(北峙)를 넘어 번암촌에서 묵었다.
초3일
경병이 본부[남원]에 들어왔다.
이 때 경병과 일본인이 각 읍마다 병력을 나누어서 진격하였다. 경병이 금산(錦山)에 들어오자 적도(賊徒)가 다 흩어졌다.
경병(京兵)이 전적(田賊, 전봉준)과 금구(金溝)에서 싸웠다. 전적이 백산(白山)으로 패주하고 나머지는 모두 흩어졌다. 감영 소속의 여러 읍이 모두 조금 평안해졌다. 그 나머지 적당들은 경군이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흩어졌다.
초4일
맑음. 운봉의 병사들이 남원에 들어오자 적도가 병장기를 다 버리고 도망갔다. 서쪽 성에서 획득한 말과 소가 수백 필이었다. 활과 총 수백자루와 적도의 가산을 적몰하였는데, 혹 옥석(玉石)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불타는 상황이 벌어져, 운성(雲城)으로 가는 길에 이고지고 가는 피난 행렬이 이어졌다. 경병이 운성 군사들이 무고한 백성들을 침학한다고 여겨 온갖 질책을 하였다. 운성 장수 박봉양이 도망쳐 산동(山東)을 넘어 본현(本縣)에 들어갔다고 한다.
관군에 도착한 보고를 통하여 팔도 동학적도 괴수 최시형(崔時亨)이 달아나 관군이 그 집만 불태우고 돌아왔으며, 적도 서장옥 역시 멀리 도망쳤다고 한다. 아, 비록 쭉정이는 김을 매면 되지만 크나큰 죄인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후일에 환란을 어찌 하겠는가. 관군이 도착하는 곳마다 털끝만큼도 침범하지 않고 거주하는 백성들을 위로하여 안도하게 하였다.
초6일
밤에 우레가 치고 땅이 흔들렸다.
초7일
맑았다가 눈이 내렸다.
초8일
맑음. 논곡(論谷)에 사는 재종숙(再從叔)이 왕림하셨는데, 본가의 편지를 전하였다. 어찌 이 편지가 만금에만 해당될 뿐이겠는가. 중당의 병환이 아직도 쾌차하지 않으니, 매우 근심스럽고 근심스럽다. 오후에 넷째 사촌형 경중씨(敬仲氏)와 벗 조이정(趙利貞)이 또한 왔다.
초9일
맑았다가 바람이 불고 추위가 심하였다. 넷째 사촌형이 되돌아갔고, 벗 조이정 역시 떠나갔다. 아우가 귀근하였다.
전해 들으니, “순창 아전 임두학(林斗鶴)이 전녹두를 붙잡았다. 이보다 앞서 전녹두와 임두학은 서로 아는 사이였다. 이때에 전녹두가 망명하여 임두학에게 도망쳐 왔는데 붙잡아서 관군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때 열읍의 사민(士民)들이 적도를 토벌하였다고 칭하고 창의(倡義)해서 호응하여 적도를 색출하여 협박에 마지못해 따르던 자도 모두 치죄하니, 거의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지경이었고 침학도 많았다”고 한다.
초 10일
맑고 매우 따뜻하였다. 아, 내가 세도(世道)의 치란(治亂)을 살펴 보건대, 거의 천시(天時)의 추위·더위와 같다. 한번 다스려지면 한번 어지러워지고 한번 추우면 한번 더워진다. 난리라도 영원히 난리가 지속될 수 없고 춥더라도 영원히 추위가 지속될 수가 없다. 난리가 극도로 달하면 다스려진 세상이 올 것이며 추위가 극히 심하게 되면 따뜻한 날이 오는 것이 이치상 당연한 것이다. 이 때문에 난리를 일으키는 적도들이 저처럼 미친 듯이 창궐하지만, 임금의 위엄이 미치는 곳마다 마침내 섬멸됨에 이르렀으니 추운 눈이 꽁꽁 얼었지만 태양이 비추면 마침내 녹아 없어지는 것과 같다. 이는 이른바 대한(大寒) 이후에 양춘(陽春)이 온다는 것이다. 이날 밤에 눈이 내렸다.
11일
맑음. 전해 들으니, “박봉양이 나머지 적도들을 다 제거하고자 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에서 순창을 지나 담양으로 향하였다”고 한다.
12일
맑음. 사촌동생 사윤이 왔다. 조모(祖母)님이 병환에서 조금 회복하셨다고 하니, 매우 다행이다. 사촌동생 역시 난리를 피해 산동리(山東里) 감동(甘洞)에 우거(寓居)하였다. 여기에서 20여리 떨어진 곳이다.
13일
맑음.
14일
아침에 비가 조금 내리다가 정오가 되자 개었다. 망전(望田) 서씨(徐氏) 어른께서 왕림하셨다.
동학적도 김개남이 처형되어 완영(完營)에서 효수(梟首)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살을 먹었다고 한다.
15일
맑음.
16일
흐렸다가 밤에 눈이 내렸다. 새 관찰사 이도재씨(李道載氏, 載는 宰의 오기)가 부임하여 동학도의 우두머리는 섬멸하고, 협박에 의해 따르던 자는 즉시 석방하였으며, 백성들을 불러 모아서 안정시켰다고 한다.
17일
눈이 내렸다. 국가에서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동학도가 미친 듯이 창궐한 것은 황지(潢池)의 좀도둑들이 장난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요, 협박에 의해 추종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다. 18∼19명의 큰 우두머리는 반드시 섬멸해야 하고 협박으로 따르던 자들은 치죄하지 말라.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백성들로 하여금 위로하여 오게 하여 편안히 모이게 하도록 하라”고 하셨다. 위대하도다. 왕의 말씀이여! 팔도의 백성들이 춤을 추듯 기뻐하며 모두 말하기를, “임금님이 오시면 죄벌이 없겠지”라고 하였다.
18일
맑음. 왜병 수백 명이 영남으로부터 운봉(雲峰)에 들어가 황산(黃山) 아래에 이르러 산림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비류가 창궐하여 왜국을 배척하는 것으로 큰소리를 삼아 일본인이 감히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했다. 이때에 비류 중 왕을 위해 적개심을 가진 자가 한 명도 없고 도리어 임금의 명을 받은 신하를 해치고 백성들을 학대함이 더욱 심하였다. 스스로 역적의 괴수가 되었기 때문에 왕사(王師)가 그들을 성토한 것이다. 혹 임금의 명으로 왜병을 보냈는데, 영남에 머무르는 왜병이 원독(怨毒)의 마음을 품고 있어 사적으로 제멋대로 행동하여 호남의 비류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으니, 잔학함이 또한 심하였다.
본읍 사또 신좌희씨(申佐熙氏)가 부임하여 백성들을 위무하여 온 경내가 편안히 모였다. 이 때 진사 이성흠(李成欽)이 참모관이 되어 본성을 방어하였다.
19일
맑음.
20일
맑음. 밤에는 눈이 내렸다.
21일
맑음. 관군이 박봉양을 금성(錦城, 나주)에 붙잡아서 가두었다. 남원 성문을 불태우고 무고한 백성들을 침학하였기 때문이었다. 운봉 백성들이 그의 원통함을 송사하였지만, 들어주지 않고 한양으로 압송하였다.
22일
맑음.
23일
맑음.
24일
맑음.
25일
맑음.
26일
맑음.
27일
맑음. 나는 귀근하였는데, 중당께서 한결같이 평안하여 매우 다행스럽다. 전해 들으니, “적당의 괴수 손화중이 장흥부사(長興府使) 박언양(朴彦陽, 彦은 憲의 오기)을 해치고 강진을 함락시키자, 관군이 토벌하여 격파하였다. 손화중이 처형(伏誅)되었고 바닷가 인근 고을이 모두 평정되었다”고 한다.
28일
안개가 낌. 가친이 주암에 행차하여 우거하셨다.
29일
납일(臘日). 아침에 조금 눈이 내리다가 아침 이후에 눈이 그치고 볕이 나타났다. 밤에 다시 눈이 내렸다. 아침 이후 눈이 그치고 햇볕이 생겼다. 밤이 되자 눈이 내렸다.
30일
맑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