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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11월[十一月]

초1일

새벽에 바람이 일어나 지붕이 날리고 모래가 날렸다. 정오에 빗줄기가 내리고 바람이 그쳤다.

초2일

맑음. 조금 비가 내리고 또 바람이 불었다.

초3일

흐림. 아, 지금 세상에 사특한 학설이 제멋대로 유행하여 이른바 오방지학(五方之學)이 있으니, 동학(東學)·서학(西學)·북학(北學)·중학(中學)·남학(南學)이다. 예전에 내가 연재 선생님께 들으니, 서학은 불문(佛門)의 반졸(反卒, 배반한 졸개)이고, 동학은 서학의 반졸이고, 남학은 기도(祈禱)를 위주로 삼고, 중학과 북학은 유도를 추종하는 듯하지만 그 실제는 바름을 해치고 참모습을 상실했다고 하니 심하도다. 아, 성왕(聖王)이 나오지 않아 중국이 침체해져 천하가 오랑캐 땅이 되었다. 오직 한 구석 우리 기자(箕子)의 동방만이 평소 ‘동노(東魯, 동쪽의 노나라)’라고 칭하였다. 말세에 이르러 선비의 풍습이 점점 야박해지고 민심도 예스럽지 않고 사특한 말들이 온 세상을 가득 차 있으니, 누가 이를 물리칠 수 있으리오. 천년 뒤에 맹자가 나오지 않은 것이 한탄스럽지만, 애통한 마음을 견딜 수 있겠는가. 저 무계(武溪) 서벽정(捿碧亭)을 바라보건대, 북풍을 맞으니 마음이 서글프다. 오직 정자의 천석(泉石)과 구곡(九曲)만이 맑고 깨끗하구나. 황홀히 귓가에 들리듯이 언제 선생님을 뵐 날인가. 옛날 중양(重陽)과 봄초에 한번 인사를 올리고 친히 가르침을 받들었는데, 갑자기 남쪽으로 내려가셨네. 세상이 혼란한 시기를 맞이하여 소식마저 멀리 막히니, 우러러 존모하는 마음만 있을 뿐이다.

초3일

처음 눈이 내려 1자(尺) 정도 쌓였다. 금년 봄부터 날씨가 조화롭지 못하여 가을에도 가뭄이 들고 날씨가 무더워서 누런 나비가 떼를 이루어 어지럽게 나니, 마치 꽃잎이 떨어지는 듯 하였다. 모기와 파리가 무리를 이루어 태산(泰山)을 짊어질 정도였다. 10월에 이르도록 감나무 꽃이 무더기로 피었다.
이보다 앞서 도적 김개남이 남원에 있었을 때, 국태공(國太公, 흥선대원군)이 초유사(招諭使)를 보내니, 김개남이 곤장 70대를 때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초유사를 따라간 몇 명 역시 혹독하게 곤장을 맞고 갇혔다고 한다.

초4일

아침 이후 아우가 귀근하였다. 정오에 사촌동생 사윤이 왔다. 이날 날씨가 맑아서 눈이 다 녹았다. 작년 가을에는 태백(太白)이 들어와야 하는데 들어오지 않았고, 올해 가을에는 나가야 하는데 나가지 않았다. 이는 병란의 조짐이다. 형혹(熒惑)이 규루(奎婁)를 범하니, 이는 화란(火亂)과 역질의 조짐이다.

초5일

이른 새벽에 일어나 『맹자』제2권부터 제3권까지 외웠다. 외우는 목소리가 더듬거리고 글 뜻이 많이 막히니, 잠시라도 공부를 중지하면 금방 막혀 버리는 우려가 심하였다. 아침에 흐리고 쌀쌀하였다. 사촌동생이 집으로 들어왔다. 나는 조령(鳥嶺)을 넘어 논곡(論谷)에 도착하여 10승(升)의 쌀을 사서 스스로 짊어지고 다시 조령을 넘어왔다. 10리 길이 마치 천 겹으로 막힌 산과 바다와 같아 열 걸음에 한번 쉬고 다섯 걸음에 한번 쉬며 소나무를 붙잡고 돌길을 따라 올라갔다. 정오에 본가에 도착하니, 어깨가 아프고 다리에 힘이 없어 하체가 내 것이 아닌 듯하였다. 우러러 옛 사람 중에 쌀을 짊어지고 백리 길을 가서 어버이를 봉양했던 고사를 생각하였다. 나약한 내 자신을 생각해 보니, 무슨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 애처롭고 애처롭다.

초6일

맑음. 저물녘에 □…□

초7일

바람이 불고 날씨가 흐림.

초8일

맑음. 둔덕(屯德)에 사는 이참봉(李參奉)[영서(永瑞)]께서 왕림하셨다. 전해 들으니, “이상규(李尙奎)가 경병(京兵)을 거느리고 전녹두를 토벌하였는데, 홍주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전녹두는 삼례역으로 도망치고 나머지 무리들은 금산을 함락시켜 방어하는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초9일

아우가 본가로 돌아와 거주하였다. 중당께서 우선 평안하시다고 한다. 매우 다행이다. 나와 아우는 해가 뜨면 산에 올라가 땔나무를 줍고 저녁에는 창문을 닫지 않고 글을 보았다. 9일 한밤 중에 하늘이 진동하여 산악(山岳)에 은은한 소리가 들렸다.

초 10일

맑음.

11일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12일

아침이 되자 조금 비가 내리다가 정오에 그쳤다. 오후에 가친께서 행차하셨다. 오후 늦게 빗줄기가 굵어졌다.

13일

조금 비가 내리고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날씨가 매우 좋지 않았다.

14일

쾌청하지 않았다. 적도가 날로 성하여 그 무리에 붙지 않으면 속인(俗人)이라고 하였다. 속인들에게 돈 100여 민(緡)을 징발하고 태형(笞刑) 40∼50대를 때리니 백성들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만약 적도를 만나면 자신 또한 동학인(東學人)이라고 사칭하면서 화를 피하려 했다고 한다.

15일

쾌청. 적도가 운봉(雲峰)을 넘고자 하여 관음치(觀音峙) 아래에 수만 명의 무리가 주둔하였다. 박주서(朴注書)는 언덕 위에 주둔하였다. 어제 이른 아침부터 오늘 새벽까지 전투를 치렀다. 적도들이 패주하여 운봉 군사들이 승승장구하여 언덕 아래에까지 추적하여 수레와 깃발과 군수품을 많이 획득하였다. 이보다 앞서 나라에서는 운성(雲城)의 방어를 엄하게 하기 위해 박주서를 순무영(巡撫營) 참모관(參謀官)으로 임명하였다.

16일

맑음. 적당(賊黨)이 번암(番岩)의 3개 마을을 불태웠다. 숲속에서 불을 놓으면서 운봉을 침입한다고 큰소리를 쳤다. 운봉을 지키는 군사들이 성치(星峙)에 주둔하고 방어하였다.

17일

맑았다가 오후에 바람이 불고 날씨가 흐림. 밤에 하늘이 진동하였는데, 이웃사람들은 모두 들었다고 한다.

18일

흐렸다가 맑아졌다.

19일

맑음. 바람이 매우 차가웠다.

20일

맑음. 나는 가친을 모시고 본제(本第)에 갔다. 중당(重堂)께서 아직 병환이 쾌차하지 못하시니 근심스러움이 끝이 없다. 밤이 되자 눈이 내렸다.

21일

아침이 되자 바람이 계속 불고 눈이 내렸다.

22일

조아침이 되자 바람이 계속 불고 눈이 내렸다.금 눈이 내렸다.

23일

맑았으나 조금 차가웠다.

24일

맑음. 나는 우거한 곳으로 돌아왔다. 대개 부모님을 떠나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은 비록 태평한 시대라도 자식된 입장에서 견딜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이 어려운 시기에 다른 곳에 떨어져 살고 있으며 길이 막히고 또 멀리 있으니 이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서글픈 마음이 그지없다. 셋째 숙부를 모시고 6살 어린애를 데리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것이 진실로 괴롭다. 저물녘에 번암(番岩)에 도착하여 석벽(石壁)으로 방비하는 곳에서 묵었다.

주석
규루(奎婁) 이십팔수(二十八宿) 중의 별 이름으로, ‘규’는 문명을 맡은 별이요, ‘루’는 원목(苑牧)을 맡은 별이다.
이상규(李尙奎)가 경병(京兵)을 거느리고 전녹두를 토벌하였는데, 홍주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상규는 확인 미상의 인물이며 전봉준은 홍주성에 진출한 적이 없다. 홍주목사 이승우는 초토사가 되어 홍주농민군을 토벌했는데 이를 오인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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