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十月]
14일
괴수 김개남이 전주부로 향하려고 하면서 민간에서 거두었던 쌀을 팔아치웠는데 쌀 1섬의 값이 2∼3민(緡)에 이르렀다. 시장 상가를 모두 불태워 부중(府中)이 탕진되고 도로마다 □…□ 아니함이 없었다. 적도 역시 부중을 근거지로 삼으니 잔멸함이 날마다 심하였다. 거주하는 백성들은 협박하여 자신의 무리를 따르게 하였는데 만약 따르지 않은 자는 속전(贖錢)을 받거나 형벌과 욕을 심하게 받았다. 협박으로 따르는 어리석은 사람이 날로 많아졌다. 이른바 사족(士族)들도 많이 추종하였다.
21일
나는 가친의 명으로 아우와 함께 처자를 거느리고 부(府)의 동쪽 번암방(番岩坊) 주암촌(舟岩村) 앞에서 우거하였다. 깊고 궁벽진 산촌이기에 적도들이 이르지 않았고, 또 운봉의 방어하는 곳과 가까워 안심하고 거주할 수 있었다. 옛집과의 거리는 70리였다.
이날 넷째 숙부와 막내 숙부께서 행차하였고 사촌동생 사윤(士允)도 왔다. 이는 거주하는 지형과 왕래할 도로를 알기 위해 머문 것인데 훗날을 기다려 가족들 모두 이곳으로 이사할 뜻이었다.
22일
두 숙부께서 되돌아가셨다. 오후에 사촌동생도 갔다. 난리 중에 친족들이 나뉘어 떨어져 있는 것은 사람으로서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훗날 응당 기약이 있기에 이로써 소회를 억제한다.
23일
비가 내렸다. 주암(舟岩)은 비록 남원 땅이지만, 궁벽진 운봉산 아래에 있어서 운봉에서 방어하는 힘을 의지해 거주하는 백성들이 안도하였다.
24일
맑음.
25일
맑음.
26일
맑음.
27일
맑음.
28일
맑음. 망전(望田)의 아사(雅士) 서씨께서 방문하였다. 들판 밖의 소식을 물으니, 전녹두가 삼례역을 근거지로 삼고, 김개남이 전주감영을 근거지로 삼았는데 열읍이 모두 탕진되어 남음이 없다고 하였다. 전라감사 김학진씨(金鶴鎭氏) 역시 떠나갔다. 동학도적 김개남이 남원에 새로 부임한 사또 이용언씨(李容彦氏)를 살해하였는데 책실(冊室) 중방(中房)도 장살(杖斃)되었고, 순천부사(順天府使)[성명을 알지 못한다.]는 곤장 20대를 맞았다고 한다.
29일
맑음. 야밤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사람들이 모두 들었다고 한다. 번암방(番岩坊)에 거주하는 백성들도 방비하여 운봉과 서로 호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