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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9월[九月]

초5일

나는 곡성(谷城) 오지촌(梧支村)으로 피해 거주하였다. 오후에 우레소리가 동북쪽에서 크게 일어났다가 얼마되지 않아서 그쳤다. 아, 나는 동학란이 일어난 이후 즉시 품에 책을 안고 산에 들어가고자 하였지만, 적도들이 창궐하여 산야가 모두 그렇게 되었다. 영남 산중에 들어가고자 하였지만 또한 도로가 극히 가기가 어렵고 어버이를 섬기고 처자식을 길러야 되는 상황이며 집안이 평소 가난하여 멀리 떠나지 못하니 통분할 뿐이었다. 날마다 아우와 함께 피신하는 것을 일삼아, 혹 다른 마을에 임시 거처를 삼았다가 혹 산에 들어갔다가, 혹 다른 고장으로 갔다. 이 몸이 마치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해 중류(中流)로 떠다니는 유랑생활을 하여 집에 도착할 기한이 없고 간간히 풍랑에 막혀 어려움을 겪었다. 그 험난을 겪은 바를 말하려 하니 더욱 떨린다.

7월 보름

나와 이성수가 서씨[병오(秉五)] 어른, 김□□이 거주할 만한 좋은 땅을 택하려고 장수(長水)에서 육십령(六十嶺)을 넘어 안의(安義) 영각사(靈覺寺)에 도착하였고, 덕유산(德裕山)을 두루 유람하고 우러러 동춘당 송선생님께서 옛날 피신하던 곳을 바라보니 산천초목이 지금까지 정채(精彩)를 띠고 있어 거의 은둔한 군자가 사는 듯하였다. 거슬러 따라갈 길이 없어 바람을 맞이하며 처량한 생각이 들 뿐이었다. 남원의 적도 수백 명이 함양에서부터 안의현으로 들어오자 군수 조원식(趙元植)이 몰래 민정을 모아서 밤을 틈타 덫을 놓아 적도 3∼4백 명을 붙잡아 다 죽였다. 함양의 민정 역시 적도 수십 명을 모두 죽였다. 내가 당시 영각사에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좋아하였다. 그렇지만 가장 한스러운 것은 본도에 마치 제대로 된 사람이 하나도 없는 진(秦)나라가 되어 수령이라는 자가 기세만 바라보면서 도망치고 혹 성문을 열어 적들을 맞이하고 혹 문을 닫고 도망가니, 온 전라도가 적의 소굴이 된 것이다. 겨우 보존한 모퉁이는 오직 나주(羅州)·운봉(雲峰)·금산(錦山) 뿐이었다.

영남 비류가 진(晉)□을 함락시키자 하동(河東) 화개동(花開洞)의 민정(民丁)이 방비를 설치하고, 안의군수 조원식도 방비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8월[八月]

나는 주암(舟岩)에서 조항치(鳥項峙)를 넘어 운봉(雲峰) 당곡(唐谷)에 도착하니, 방비가 날로 완벽해지고 민심이 날로 화합되었다고 한다.

9월[九月]

남쪽의 동학적도 유학규(劉學圭)가 밤을 틈타 용령(舂嶺)을 넘었다고 한다. 마을에서 곡식을 마구 거두는 잔학한 행동이 더욱 심하였다. 박주서[박봉양]가 이 소문을 듣고 아침 이후 성을 지키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가서 적들을 맞이하여 쳐서 크게 격파하니 적당이 모두 도망쳤다고 한다. 운봉 백성들이 죽음으로써 방어하자 적당이 엿보지 못하였다. 내가 다시 운봉에 우거하려고 10월 11일로 택일하였는데, 집안의 연고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주석
본도에 마치 제대로 된 사람이 하나도 없는 진(秦)나라 선견지명을 지니고 바람직한 계책을 세울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하동(河東) 화개동(花開洞) 지리산 입구인 섬진강 가에 있는 화개동에서는 지리산에 근거를 둔 농민군과 산포수 등 민포군이 서로 전진 후퇴를 반복하는 접전을 벌여 황폐할 지경이었다. 1894년 9월 3일 농민군은 하동부에 도소를 설치하고 자치행정을 도모했고 민포군은 이들을 몰아냈다. 김인배는 농민군을 이끌고 하동 농민군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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