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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8월[八月]

19일

본부(本府, 남원부) 부동(釜洞)의 동학적도 강감역(姜監役), 유학규(劉學圭)가 다른 고장의 동학도 수천 명을 거느리고 본부에 와서 병장기와 활, 총, 화약을 도둑질하여 빼앗아서 말에 싣고 부동으로 갔다. 망가진 활과 남겨진 철조각은 모두 길거리 아이들의 장난감이 되었다. 성안이 텅 비었다. 적당이 날마다 모여들어, 교룡산성(鮫龍山城, 鮫는 蛟의 오기)에 근거한 자가 수만 명이고 남원부 성안에 근거한 자 역시 수만 명이었다. 잔학한 행동이 매우 심하였다. 운봉(雲峰) 영장(營將) 김(金)[이름을 잃어버렸다.] 역시 성을 비우고 도망갔다. 주서(注書) 박봉양(朴鳳陽)은 민정(民丁)을 모아 방어하려는 계책을 세웠다. 박봉양은 본래 운봉 부호(富豪)의 관리였다. 적당의 토색질이 날로 심하여 돈과 곡식으로 제어하기 어려워 몰래 장수(長水)의 동적 황내문(黃乃文)에 붙음으로써 화를 모면하려고 하였다. 다른 마을의 적당의 잔학한 행위가 심하여 마침내 방비의 계책을 세우고 민정을 모아 산 위의 중요지점에 군막을 설치하여 지켰다. 군율이 매우 엄정하여 적들이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나는 운봉에서 방비한다는 소식을 듣고 운봉의 당곡(唐谷)에 우거하려고 하였다.

26일

아우와 더불어 처자를 거느리고 행장을 꾸려 연치(鳶峙)에 갔는데, 방비가 매우 엄격해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날이 저물어 다시 옛 거처로 되돌아왔다. 적도가 촌락을 횡행하여 잔학한 행위가 더욱 심하였다. 나는 다른 곳에서 투숙하고 처자는 이웃마을에 피신하여 살고 있으니, 그동안 생활의 어려움이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적도가 날로 번성하여 포학한 행동을 마치 경작하는 일로 삼아 민간의 돈꿰미와 곡식을 담아둔 항아리가 모두 적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적의 괴수 김개남은 전라도 동학 도회(都會)를 본부에 설치하고 5영(五營)을 만들었다. 전영(前營) 적장(賊將)은 남응삼(南應三), 후영(後營) 적장은 김홍기(金洪箕), 우영(右營) 적장은 김대원(金大爰), 좌영(左營) 적장은 김용관(金龍關), 중영(中營)의 도통 적장(都統賊將)은 김개남이 맡았다. 김우칙(金佑敕)은 모주(謀主)가 되었다. 각 군영이 거느리는 자가 5∼6천여 명이고, 기타 이른바 적의 괴수는 이루 셀 수가 없었다.

순창군수 이성렬이 당시 삼도전운사(三道轉運使)가 되어 여러 고장에 포유해 공상(供上)하라고 알렸다. 동학적 김개남이 이 소식을 듣고 순창에 글을 보내 남원에 군수품을 전운하게 하니, 순창군수가 아전과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전운사가 되었으니 어찌 적이 있는 곳에 전운할 수 있겠는가. 결코 적과 더불어 같이 살 수 없다”라고 하고 즉시 상경하려고 하자, 아전과 백성들이 길을 막고 머물기를 원하여 적도들이 탈취할 수가 없었다.

본도의 대동목(大同木) 역시 민간에서 공전(公錢) 전세미(田稅米)로 매결(結)마다 10두(斗)를 거두었다. 이보다 앞서 적이 각 방(坊)에서 백미(白米)를 거두었는데 대방(大坊) 100섬, 소방 80∼90섬이었다. 본읍 48방(坊)에서 거둔 백미가 몇 백섬인 줄 알지 못할 정도이다.

충청도 적당이 마을을 횡행하며 잔학한 행동을 심하게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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