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七月]
초2일
동학적도 전녹두가 남원에 들어갔다. 적당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성대해져 마을들을 횡행하자, 거주민들이 도망쳐 깊은 산중으로 피신하였다. 마을에는 개들 만이 남아 저녁 내내 짖었다. 본군 사또 윤병관씨(尹秉寬氏) 역시 관아를 비우고 떠나갔다. 이보다 앞서 나주목사 민종렬씨(閔種烈氏)가 영장(營將) 정석진(鄭錫振)과 함께 비류 수십 명을 붙잡아서 죽였다. 이때에 적들이 나주를 친다고 큰소리를 치자 민공(閔公)과 영장이 죽을 힘을 다하여 성을 방어하자 적이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아, 본도 50여 고을[53주]이 있는데, 고을마다 모두 동학도의 기세를 바라보고 달아났지만, 유독 전라도 지역에서 보호된 곳은 나주 한 고을뿐이었다. 만일 각 고을마다 모두 수비하였다면, 적도들이 어찌 이처럼 창궐할 수 있겠는가.
청국이 원세개(袁世塏, 塏은 凱의 오기)를 소환하고 그 부장(部將) 섭제초(葉提招, 葉志超의 오기)를 남기고 떠났다. 왜병이 □□이르러 섭장군이 일본군과 청주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그곳에서 전사하였다.
왜놈이 6월 20일 대궐을 침범하고 임금을 핍박하여 청나라를 배신하고 그들과 화친하게 하였다. 우리나라의 의복을 저들의 제도에 따르게 하였다고 한다. 이달 15일 이후 의복제도를 변경하였는데, 여러 고을에 명령을 내려 반포하고 명령이 도착한지 5일을 기한으로 삼았지만, 백성들은 감히 먼저 따르고자 하지 않았다. 아, 지난 갑신년(1884)에 청나라 사람들이 처음 경성에 도착하고 우리나라의 의복제도를 보고서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우리의 속국인데 관복(官服)을 어찌 하여 상국(上國)을 따르지 않는가”하고서 온갖 방법으로 힐난하자 우리나라는 할 수 없이 청국 제도를 따랐다.[당시 연재선생께서 상소문을 올려 힘껏 간언하였지만 듣지 않았다.] 청국 제도를 시행한지 3개월 만에 옛 제도를 회복하였다. 지금 1년이 채 되지도 않아 또 왜국의 제도를 따르게 되니, 참으로 통곡할만한 일이다. 선비된 자가 어찌 오랑캐 옷을 입고서 몇 자되는 몸뚱이의 목숨을 구해서야 되겠는가. 맹세코 죽더라도 오랑캐 옷을 입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