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五月]
초1일
맑음.
초2일
맑음.
초3일
관군이 비류를 토벌하여 비류 중에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난리 우두머리 전녹두는 선화당(宣化堂)에 앉아 백성들을 호령하여 잔학한 행위가 더욱더 심하였다. 당시 새로 부임한 관찰사 김학진씨(金學振氏, 學振은 鶴鎭의 오기)가 삼례역(參禮驛)에 도착하였지만, 성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청나라 장수 심(瀋)·양(楊) 두 사람이 소속 군사들을 거느리고 구원하러 그곳으로 갔다고 한다. 당시 초토사 홍재희가 하읍(下邑)에서 비류를 추격하다가 금구(金溝)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금구현에 도착하였으나, 적들이 이미 전주를 함락시켰다. 그래서 곧바로 거느리던 군사가 매우 적어 지나가는 곳에서 민정(民丁)들을 모집하고 또한 농사를 짓던 장정을 몰고 가니 감영 소속의 여러 읍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비류가 성안에 있으면서 날마다 가무를 일삼고 부녀자들을 뽑아서 비장청(裨將廳)에 모아서 아전과 백성의 베와 비단을 찾아내 매일 옷을 만들게 하였다. 이는 비류가 초봄에 고부에서 모인 뒤로 이 무더위를 당할 때까지 아직도 옷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성에 들어오자 옷을 만드는 것으로 일을 삼았던 것이다.
전녹두는 본래 우두(牛痘)를 하는 천한 의원이었는데, 여러 읍을 두루 다니면서 기이한 학문을 전하였다. 난리를 일으킨 날에 이르러, 재주가 없다는 명칭을 싫어하고 사람들이 자기를 깔볼까 걱정하였다. 그래서 은밀히 고부 아전의 14∼15세가 된 어린이를 선발하였는데, 장두(仗頭, 仗은 狀의 오기) 라고 부르고 혹 노새를 타고 앞 선두에 서게 하였다. 군진에 임했을 때는 그 아이에게 지휘하게 하고 정가(鄭家)의 신동(神童)이라고 사특하게 칭하였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미혹되어 추종하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또 동학도들이 여러 사람들과 식별하기 위해 옷 등 위에 도장을 찍어서 붙였다. 전주성에 들어간 후 거주하는 백성들에게 하나같이 동학도의 복색(服色)을 따르게 하였다. 백성들이 혹 성 밖으로 달아나면 관군과 감영 소속의 백성들이 비류라고 지목하여 살상한 자가 매우 많았다. 전주성 안에 있는 거주민들은 나가지도 못하고 그냥 있지도 못하였다. 관군이 비류와 전투를 치렀는데, 비천포(飛天炮)를 쏘아 훤하게 다리를 비추었는데 불길이 이르는 곳마다 민간의 집들이 모두 전소되었다. 성 서쪽이 더욱 심하였다.
초4일
맑음. 나는 서씨[병오(秉五)] 어른과 함께 당곡에 가서 이성수를 방문하였다.
초5일
맑음. 정오에 땅이 진동하여 산악(山岳)이 모두 함몰되는 소리가 있었다.
초6일
맑았다가 오후 늦게 비가 내렸다.
초7일
아침 이후 잠깐 비가 내리다가 그쳤다. 서씨 어른과 이성수와 동행하여 운봉현에 도착하였다. 오후에 비가 심하여 이 때문에 그곳에서 유숙하였다.
초8일
쾌청하였다. 상원천(上元川)에 도착하여 이성수와 고별하니 마음이 슬펐다. 서씨어른과 함께 본부(本府, 남원부) 고을에 도착해서 크게 놀랐다. 초토사가 본부로 하여금 소 10마리, 말 20필을 납부하라고 하고 새로 부임한 감사도 말 20필을 납부하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본읍 사또[윤병관씨(尹秉寬氏)]가 장교와 아전을 보내 민간을 뒤져 찾게 하니 장교와 아전의 침학이 더욱 심해져 민정이 흉흉해졌다.
초9일
아침 이후 집에 도착하였다.
초 10일
흐림.
11일
흐림.
12일
비가 내렸다.
13일
흐리다가 맑아졌으며, 밤에 비가 내렸다.
14일
비가 정오가 되자 그쳤다.
15일
비가 내리다 즉시 날이 개었다.
16일
비가 내리고 또 쾌청해졌다.
17일
맑음.
18일
맑음. 연일 비가 내렸으나 농사를 짓는 것을 위로하기에 부족하였다. 관군과 비류가 조정(調停)하여, 비류가 부대를 나누어 조금씩 전주성을 나와 김제로 갔다. 본읍 군수가 우대하였고, 새로 부임한 관찰사 김학진씨가 여러 읍에 전세(田稅)의 원결(原結) 외에 잡역을 낱낱이 제거하게 하였는데 하읍(下邑)에서는 고치지 않은 것이 아직도 많다고 한다. 이보다 앞서 비류가 강진에 주둔해 모인다고 큰 소리를 쳤다. 그런데 홍장(洪將, 홍계훈)이 전라감영을 근거로 삼아 불우한 사태를 대비하고자 하였다. 재신인 민영준(閔永俊, 泳駿의 오자)에게서 지시를 받게 되어 전주에서 출발해 강진으로 추격했는데 강진병영(康津兵營)에 이르기도 전에 적병이 이미 전주를 함락시켰다고 한다.[이하 역시 망실한 것이 많다.]
5월[五月]
왜놈 수천 명이 밤에 경성을 넘어 들어와서[어떤 사람들은 중전(中殿)이 동학을 토벌하려고 왜놈들을 요청해서 왔다고 말하였다.] 남산 아래에 진을 쳤다. 옛날 경성에 머무는 왜놈들은 모두 장사를 일삼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상점을 닫았고 왜의 부인들 역시 밤에 나와 떠나니 성안의 민심이 크게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