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三月]
초1일
일식(日食)이 있었다. 나는 보지 못했는데 이웃의 여러 사람이 보았다. 정오에 일식이 있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회복되었다고 한다.
초2일
아침 이후 비가 조금 내렸다.
초3일
흐림과 맑음이 서로 교차하였다.
초4일
쾌청.
초5일
맑음.
초6일
나는 망전(望田)에 갔다. 오후에 비가 조금 내렸다. 오후 늦게 서장 병오(徐丈秉五)를 방문하였다.
초7일
비가 내렸다.
초8일
□…□ 또 비가 조금 내렸다. 보행하기 어려워 이틀을 그 곳에서 묵었다.
초9일
맑음. 날이 개인 이후 봄날 산경치가 좋았다. 출발하여 후천(後川)을 지나다가 김사흥(金士興)을 잠깐 방문하였다. 저물녘 집에 도착하였다. 어제 저녁 아우가 한양에서 돌아왔다. 가친의 기후(氣候)가 대략 평안하다고 하였다.
초 10일
맑음. 정동(亭洞) 오명여(吳明汝)가 와서 방문하였다.
11일
맑음.
12일
맑음. 성수(聖授)가 귀근(歸覲)하였다.
13일
맑음.
14일
흐리다가 밤에 비가 내렸다.
15일
아침부터 정오까지 비가 내려 도랑들이 모두 물에 차득 찼다.
16일
아침에 안개가 짙게 끼어 비가 내릴 듯하여 종일토록 어두침침하였다.
17일
흐림. 오후에 이성수가 이곳에 도착하였다. 밤에 비가 내려 도랑이 터졌다.
18일
쾌청.
19일
맑음.
20일
저물녁에 비가 내렸다가 밤이 되자 더욱 세게 내렸다.
21일
비가 내리고 바람이 크게 불어 보리가 모두 쓰러졌다.비가 내리고 바람이 크게 불어 보리가 모두 쓰러졌다.
22일
쾌청. 나와 이성수는 운봉(雲峰)에 가서 연치(鳶峙)에 올라갔다. 어제 불었던 바람으로 소나무에 꽃이 피기도 하였다. 저물녘 당곡에 도착하였는데 이성수가 사는 곳이다.
23일
나는 그대로 머물렀다.
24일
새벽부터 아침 내내 비가 내렸다가 아침 이후 개었다.
25일
맑음.
26일
맑음.
27일
맑음.
28일
아침에 비가 잠깐 그치다가 내렸다. 오후에 바람이 일어나 지붕이 날리고 모래가 날렸다.
29일
나와 이성수는 지팡이를 짚으며 연치(鳶峙)를 넘어가 본부(本府)에 도착하였다. 소문을 들으니,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이 매우 심하여 백성들이 초봄에 난리를 일으켰다가 중지했었는데, 이번에 다시 선동하여 봉기하자 조병갑이 도피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조정에서 광주인(光州人) 박원명(朴原明, 原은 源의 오식)을 고부군수로 제수하였는데, 안핵사(按劾使, 劾은 覈의 오기) 조모(趙某)가 난리의 우두머리 전녹두(田彔頭, 전봉준의 별칭)의 아비를 옥에 가두어서 그 무리들이 이웃 고을에 모두 모여 말을 퍼뜨리며 고부로 향하자, 고부 군수 박원명이 전주 감영으로 달아났다. 대체로 녹두는 동학의 괴수로, 민요(民擾)의 발생을 틈타 무리를 모았는데, 그 무리가 여러 마을에 두루 퍼져 있었다. 혹 밭기구를 빼앗아서 농기구를 주조하고, 혹 각 고을의 병장기를 빼앗았다. 이보다 앞서 동학 무리들이 꿩을 파는 말로 민간(民間)에 퍼뜨려, 만약 꿩을 잡아온 사람에게는 후한 가격을 주겠다고 하였다. 어떤 포수가 꿩을 잡아 가니, 5냥의 가격을 주었다. 이에 여러 고을의 포수 수십 명이 꿩을 잡아갔다가 도리어 총을 다 빼앗기고 값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전라감사 김문현씨(金文鉉氏)가 여러 읍에서 속오군(束伍軍)을 모집하였는데, 큰 읍은 2백여 명, 작은 읍은 1백여 명을 모아 고부의 구원병으로 보냈다고 한다. 또 들으니, 동적(東賊)이 공주에 모였는데 그 무리 역시 수천 명이 되었다고 한다.
29일
맑음.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