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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9월[九月]

초1일

비가 내림.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이 한가하고 창가가 고요하니 제군들은 글을 읽을 만하구나”라고 말하였다. 이에 우옹(尤翁), 송시열이 찬집한 주서(朱書)의 무신봉사(戊申封事) 조목을 한번 읽고서 파하였다.

초2일

맑음. 아침 이후 선생님께서 정자 위아래로 지팡이를 짚고 시냇가를 거슬러 올라가 뛰어난 경치를 택하여 별도로 구곡(九曲)을 만드셨다. 제1곡의 이름은 은귀암(隱龜岩), 제2곡의 이름은 와룡담(臥龍潭), 제3곡의 이름은 도소대(嶋巢臺)이다. 정자 오른쪽에 층층히 쌓인 암석이 벽처럼 천길 높이로 서 있어 초연히 세상에 홀로 남겨져 서있는 상(象)이 있었다. 위로 대은굴(大隱窟)이 있는데, 선생님께서 동방일사(東方一士)라고 자호(自號)하였기 때문에 그곳을 일사대(一士臺)로 이름 하였는데, 바로 제4곡이다. 정자 아래에 도화담(桃花潭)이 있다. 제5곡은 가의암(可義岩), 제6곡은 한벽소(寒碧沼), 제7곡은 추월담(秋月潭), 제8곡은 만조대(晩釣臺)이다. 제9곡은 은선병(隱仙屛)이 천길 높이 솟아있는 석벽(石壁)이 병풍처럼 한쪽을 두르고 있었는데, 귀신이 마치 다듬어 깎아놓은 듯하였다. 그 아래 물굽이가 ‘파(巴)’자 모양으로 흘렀기에 이름을 ‘파회(巴廻)’라고 하였다. 내가 선생님께 묻기를, “이곳의 승경이 화양동과 어떠합니까?”라고 하니,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화양동의 경치가 이보다는 뛰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화양동 반폭대(半瀑臺)에 들어가면 여기보다 나은 듯 하다”고 말씀하셨다.
오후에 금령(琴嶺)을 넘어 무주(茂朱) 두문촌(斗文村)에 묵었다. 다음날 선생님께서 행차하셔서 무주의 여러 유생에게 상읍례(相揖禮)를 행하고 논어, 맹자, 대학, 시경을 강론하였다. 나는 외람되이 말석에 참여하였다. 오후에 나는 종인(宗人) 성보씨(性甫氏)를 방문하였다.

초5일

오후에 선생님께서 적상산성(赤裳山城)에 행차하셨다. 나와 군습(君習), 경행(景行), 김학노(金學老), 김성강(金性剛) 등 수십 인이 산 아래 치목촌(緇木村) 오씨(吳氏) 집에서 모시고 묵었다.

초6일

맑음. 동문(東門)으로부터 올라갔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제군들은 일찍이 이 산에서 노닌 사람이 몇 명이냐? 내가 이 산을 유람한지가 지금 모두 세 차례이다”라고 하였다. 석벽 사이에 한 가닥 길이 돌 위로 걸려있는데, 노새가 나아가지 못하여 노복이 부여잡고 채찍질하며 몇 번 넘어지면서 소나무를 부여잡고 돌사다리를 올라갔다.
오후에 산사에 도착하였다. 산사는 높은 봉우리 위에 있었는데, 선원각(璿源閣)이 있고 장사실(藏史室)이 있었다. 오후에 안염대(眼厭臺)를 향하였다. 어떤 한 깡마른 선승(禪僧)이 길을 가르쳐주어 돌을 부여잡고 올라갔다. 석대(石臺)는 평평하고 높이 솟아 있는데 백여 명이 앉을 만하였고 아래는 아득히 땅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말하기를, “대(臺)의 이름에 대해 어떤 자가 옛날 국사(國史)를 안염(按廉)하던 사신이 이곳에 올랐는데, 그 때문에 안염대(按廉臺)라고 이름한 것이다”고 하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곳에 올라가 조망하는 자가 눈에 힘을 주어 실컷 보기 때문에 안염대(眼厭臺)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제생들이 단율(短律)을 지으셔서 가르침을 내려주기를 청하자 선생님이 ‘대臺’자 운으로 시를 지었다. 안염대 근처에 동서로 두 개의 석굴이 있었다. 그 깊이와 넓이를 물으니, 직접 탐사한 자가 서너 명을 수용할 만한 곳이라고 하였다. 옛날 임진왜란 때 어떤 중 하나가 선계(璿系)와 국사(國史)를 받들어 이곳에 보관하여 다행히 수많은 중요한 서적을 온전하게 지켜낼 수 있었다고 하였다. 날이 저물어 내려와 산방(山房)에서 묵었다.

초7일

선생님의 행차가 돌아가셨다. 선생님의 가마가 출발하자, 나는 군습과 함께 절을 하고 작별하였다. 성의 남문(南門)에서 나오니 돌길이 위험하여, 돌을 등에 대고 내려왔다. 아름답도다. 이 산의 험준함이여! 진실로 나라를 보존하는 보배이다. 그러나 어찌 험준함을 믿고서 삼가지 않고 부도덕할 수 있겠는가.

초8일

맑음. 저물녘에 장수현(長水縣)에 묵었다.

초9일

아침에 비가 왔는데, 아침 이후에는 쾌청하였다. 달빛을 받으며 집으로 도착하니 중당(重堂)께서 한결같이 평안하셨다. 아우가 그저께 한양에서 돌아왔다.[이하는 망실하였다.] 이해 겨울 날씨가 매우 따뜻하여 감나무 꽃이 혹 피었으며, 탱자 열매를 섣달 그믐에 보면 푸르기도 하고 누렇기도 하며 크기가 오동나무 열매와 같았다.

섣달 그믐날

밤에 야계(野鷄)가 모두 밤에 울었는데, 집에서 기르는 닭은 유독 울지 않았다.[이하 역시 망실하였다.]

주석
주서(朱書)의 무신봉사(戊申封事) 주서는 주희의 글, 무신봉사는 주희가 바른 정치를 펴라는 내용을 올린 봉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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