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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8월[八月]

15일

맑음. 오후에 조군습(趙君習)과 함께 원계(遠溪)로 가려고 비안정(飛雁亭)에서 묵었다.

16일

맑음. 부동(釜洞) 김석균(金錫均) 어른의 집에서 묵었다. 밤이 되자 비가 내렸다.

17일

맑음. 북치(北峙)를 넘었다. 우연히 구토하고 설사하여 밤새도록 신음하였는데 아침이 되자 조금 나아졌다.

18일

개임.

19일

개임.

20일

비를 무릅쓰고 무주(茂朱)에 도착하였다.

21일

오후에 율치(栗峙)를 넘어 저녁에 비를 무릅쓰고 원계(遠溪)에 도착하였다. 선생님께서는 석남(石南) 옛 살던 곳에 행차하셨다.

22일

조군습, 송원명과 함께 문의(文義)를 강마하였다.

23일

쾌청. 선생께서 돌아오시고 오후에는 권공립(權公立)이 왔다.

24일

맑음. 선생님의 생신이시다. 아침 일찍 활산(活山)의 심석(心石) 문장(文丈)[선생의 아우이다.] 께서 원회(原晦)를 거느리고 와서 참여하였다. 각 곳의 많은 사우(士友)가 멀리서 왔다. 모시는 자리가 매우 엄숙하면서도 화기애애하였다.

25일

맑음.

26일

맑음. 정부인(貞夫人) 한씨(韓氏)의 생신이시다.

27일

맑음.

28일

맑음.

29일

맑음. 선생님께서 무계산(武溪山) 정자에 행차하셨다. 따르던 자는 나와 조군습과 조경행(曺景行) 뿐이었다. 선생님을 모셨는데, 잠깐 활산의 심석 문장 집에 들어갔다. 심석 문장께서 「존덕성재명(尊德性齋銘)」을 써서 나에게 주었다. 즉시 출발하여 길을 반쯤 가다가 선생님이 달전(達田)에 행차하셨다. 따르는 자는 오직 조경행 뿐이었다. 나는 군습과 곧바로 산의 정자에 도착하여 저녁에 설천(雪川)에서 묵었다.

30일

맑음. 금삼령(金三嶺)을 넘어 오후에 산정(山亭)에 도착하였다. 정자는 무주(茂朱) 무이봉(武夷峰) 아래에 있었다. □계(□溪) 위의 자연경치가 뛰어나 주부자(朱夫子)의 무이정사(武夷精舍)와 아름다움을 필적할 만했고, 지명 역시 서로 부합하니, 이는 우연이 아니다. 오후에 선생님께서 행차하셨다. 옷자락을 걷고 올라가 위와 아래, 좌우를 둘러보니 맑고 멀리 보이는 경치를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었다. 정자에 ‘서벽(捿碧)’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는데 당나라 시(詩)인 ‘내게 무엇 때문에 푸른산에 깃들어 사는지 묻네(問余何事捿碧山)’의 뜻을 취한 것이다. 정자 편액은 선생님께서 친히 지으신 것이다. 서문은 대제학 한장석씨(韓章錫氏)가 지은 것이고, 또한 이용원씨(李容元氏)의 기문(記文)이 있었다. 유아루(有我樓)와 □□문(□□門)이 있는데, 5언시(五言詩)가 판 위에 많이 걸려 있었다. 하나는 선생님께서 친히 지으신 것이고, 두 수는 입재(立齋) 상공(相公)[근수(近洙)선생의 숙부이다.]께서 차운하신 것이다. 두 수는 심석 어른께서 차운하신 것이다. 또 김계운(金溪雲)[낙현(洛鉉)] 어른, 박운창(朴雲牕)[성양(性陽)] 어른, 송침천(宋枕泉)[응수(膺洙)] 어른께서 지으신 여러 편의 시이다.

주석
무이정사(武夷精舍) 무이는 중국 복건성에 있는 산이름인데 남송 주희가 학문을 닦던 곳이다. 주희는 이곳에서 무이구곡(武夷九曲)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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