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十二月]
12월
대구 포교(砲校)가 기동(耆洞) 마항현(馬項峴)에 들어가 돌을 캐는 곳의 초막(草幕)을 불태우고 신상제(愼喪制)[송용주(宋鏞周)와 함께 주사(主事)가 된 자이다.] 등 5∼6인을 붙잡아서 갔다.[송용주가 마침 그 곳에 있지 않아 놓쳤다.] 그 나머지 무리는 도망쳐 사람들이 모두 근심을 덜었다.
김기범(金琦範, 琦는 箕의 오자)이란 자가 개남왕(開南王)이라며 참칭(僭稱)하고 남원부(南原府)를 분할하여 점거하였다고 한다. 이는 모두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부류이니, 어찌 깊이 근심할 것이겠는가.
전해 들으니, “전라 감영에는 방백(方伯, 관찰사)이 없고 25개의 고을에는 수령이 없다고 한다. 전봉준이 7만 5천인을 거느리고 전라감영을 점거하고 여러 군을 침략하여 전체 전라도 땅이 마치 무인지경이 되었다. 한양에 거주하는 이 아무개는 동학 무리를 격파하기를 자원하여 3만명을 통솔하여 곧바로 전라감영에 이르러 빙 둘러서 포위하여 크게 격파하니, 저 무리들이 모두 몰살을 당하였고 살아 돌아간 자가 거의 없었다. 거창과 안의 병력은 서쪽을 넘어 진격하고 함양과 운봉의 병력들은 북쪽을 넘어 진격하자, 동학무리들이 어디로 갈 데가 없어 영동(永同) 땅을 넘어 장차 괘방령(掛榜嶺)으로 향한다”고 한다.
본읍 김산군 봉계 조승지(曺承旨)[시영(始永)], 상주(尙州) 우산(愚山) 정승지(鄭承旨)[의묵(宜默)]가 소모사(召募使)가 되어 경상도의 좌도와 우도를 나누어 통솔하여 바야흐로 의병을 창도하였다. 이 기별을 듣고 조소모(曹召募)가 본읍의 군정(軍丁)을 일으켜 요충지를 지키고 각 읍의 군대를 일으켰다. 대구 군사 3백인이 용금문(湧金門) 밖에 유진(留陣)하고, 성주 군사 1백 2십인이 천포(泉浦) 들판에서 유진하고, 선산(善山) 병졸과 개령(開寧) 군사 10명이 황간(黃澗) 창촌(倉村)에서 유진하고, 상주 군사 80명이 추풍방현(秋風防峴)에서 유진하여 칼과 창이 삼엄하니, 위세가 가을서리와 같았다. 그리고 지공(支供)은 모두 스스로 마련하였다.
상주(尙州) 유격장 김주노(金疇老)가 500명을 거느리고 영동(永同) 용산시(龍山市)에 들어가 동학도와 접전하였는데, 비류들이 양쪽에서 공격하였다. 김주노는 밤에 도망치고 군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상주 소모영(召募營)이 이 기별을 듣고 또 정포(精砲) 수백 명과 일본인 50명을 보내, 밤을 틈타 용산시에 들어갔다. 저들이 촌가에 흩어져 있다는 말을 듣고서, 곧장 보은(報恩) 북실촌(北實村)에 도착하여 온 마을을 포위하고 동시에 일제히 총을 쏘니, 죽은 비류와 속자(俗子)가 태반이었다. 이 밤에 비류 중 도망간 자 역시 많았다. 이 사건 이후 동학의 화란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래서 본읍 소모영의 병력을 혁파하여 집으로 각각 보내고 본읍의 병정 3백 명만을 머물게 하여 방어하게 하였다.
22일
조소모령(曹召募令)께서 연주(蓮柱)의 향원(鄕員) 모임에 참석하였다.
25일
동학의 우두머리 편보언(片保彦, 保는 輔의 오식)과 남정훈(南廷薰) 등 4∼5놈을 붙잡아 김천(金泉) 시장에서 총살하니, 통쾌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전후 죽인 자가 거의 20명에 이른다고 한다. 담당자를 정할 적에 중제(仲弟) 자적(子笛)도 일기관(日記官)으로 참여하여 요호(饒戶)를 뽑아서 군량미를 대비하였다.
27일
큰 눈이 내렸다.
28일
읍리(邑吏) 박만주(朴萬炷)가 새해 달력 1건, 황육(黃肉) 3근, 당목(唐木) 2척(尺)을 보내왔고, 호장(戶長) 백란태(白鸞台)가 새해 달력 1건을 보내왔다.
이 해의 세의(歲儀)가 전에 비해 반이나 감소되어, 들어온 것이라곤 단지 청어(靑魚) 7지(枝), 북어(北魚) 2부(孚), 대구어(大口魚) 3미(尾) 뿐이었다. 이 역시 난리가 지난 후 인심이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