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十月]
초 2일
영백(嶺伯)[조병호씨(趙秉鎬氏)]이 영장(營將) 최모(崔某)를 보냈는데, 병정 2백 명을 거느리고 가서 그 무리를 격파하고 우두머리를 섬멸하고 협박에 의해 따르던 자들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초 5일
대구 병정이 김천에 들어가니, 편보언이 도망가고 그 나머지 포솔은 새벽의 별처럼 흩어졌다. 영장이 접주와 죄가 있는 사람의 성명을 적어 벽에 걸어서 찾아내 붙잡았다고 한다.
초 6일
병정들이 기동 강영의 집에 들어가니 강영은 이미 구곡에 도망가 김태화[강영의 아들 사돈으로 강영의 포솔이 되었다.] 집에 숨었다. 병정들이 그 집(강영집)에 간직한 물건을 몰수하고서 몰래 구곡으로 가서 김태화를 결박해 문초하였다. 김태화와 병정이 함께 장암(壯岩)에 가서 강영을 체포하여 김천 영장(營將)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한쪽에는 강영을 엎드리게 하였고, 한쪽에는 김태화를 엎드리게 하였다. 영장이 죄를 열거하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다른 사람의 재물과 곡식을 빼앗고 읍의 병장기를 빼앗아 군사를 일으켜 역모를 꾀하니 어찌 된 일이냐!”라고 말하고는 큰 곤장으로 12대를 친 후에 강영을 총살하였다. 옆에 있던 김태화가 혼비백산하였다. 은밀히 조순재를 체포했으나 놓쳤지만 뒷날의 탈이 없었다. 이는 대개 종숙 승지영(承旨令)의 힘이었다. 아, 강영과 조순재는 명문가의 자제로 죄를 지어 화를 당하니 더욱 애석하다.
7일
병정이 공자동(孔子洞)에 들어가니 모든 마을 사람이 도피하고, 접주 장기원의 온 가족이 도망갔다. 그래서 그 집을 불태웠는데, 이웃집 7채가 계속 이어져 불에 탔다. 이는 뜻밖의 재앙이 아니겠는가.
8일
병정이 지례에 들어가 4명을 총살하였다고 한다. 일본인 20명이 동학도를 붙잡기 위해 또 김천에 들어갔다가 도인이 귀화했다는 기별을 듣고 물러났다. 이후에 도인의 명색이 자취를 감추고 적막히 소리가 들리지 않아 인심이 통쾌하게 여겨 마치 구름을 걷고 맑은 하늘을 보는 듯하였다.
지례현감이 병정 100명을 만류하여 남겨두어 훗날의 걱정을 방비하였다.
25일
초관(哨官) 장교혁(張敎爀)이 병정 2백 명을 거느리고 또 김천에 들어가 도인(道人)을 찾아내 체포하고 죄가 있는 자는 총살하고, 죄가 없는 자는 풀어주었다.
황간의 도인이 다시 고개를 넘어오자 개령과 김천 두 고을의 수령이 집집마다 장정을 뽑아 각기 총과 창을 들게 하고 머리에 흰 두건을 씌우고 김천 시장에서 점고하여 불우의 사태를 대비하였다.
원근 지역의 부잣집 중 도인의 피해를 입지 않는 집이 없었는데, 본읍 김산군 봉계(鳳溪)에 사는 정도사(鄭都事)[운채씨(雲采氏)]만이 초연히 홀로 화를 면하였다. 이를 통해 그가 인심을 많이 얻었음을 알 수 있다.
몇 년전에 자신 소유의 논 6석(石) 3두락지를 내어 종중에 납부하여 의장(義庄)으로 삼았으니, 이는 범문정공(范文正公)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니 누가 우러러 흠모하지 않겠는가.
마항현(馬項峴)에 석당(石黨)들이 유회(儒會)라고 칭하고 도소(都所)를 기동(耆洞)에 설치하고 각 읍과 동네에 통문을 보냈다. 그 글의 대강의 내용은 죄의 유무를 막론하고 천지가 생명을 좋아하는 덕에 귀의하여 모두 더불어 새롭게 되고 일제히 모여서 토론을 하여 옛날처럼 편안히 지내자고 말하였으니, 이는 모두 우두머리 송용주의 소행이다. 이것은 동학도인들이 숨어 지내고 있는 틈을 타서 그들의 무리들에게 붙고자 하는 계책일 뿐이다. 비류가 조금씩 잠잠해져 인심이 조금 편안해졌다. 하지만 석당에 붙는 자가 많았다. 이는 여기서 벗어나 저기에 들어간 자가 아니겠는가.
대개 돌을 깨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겉으로는 신물(神物)을 구하고자 의탁한 것이고, 안으로는 무리를 모으려고 한 것이다. 철을 사서 칼을 주조하고 대나무를 베어 활을 만들었다. 혹자는 남학(南學)이라고 말하고 혹자는 북학(北學)이라고 말하는데, 그 속을 모르니 걱정이 적지 않다. 사람들이 모두 흉흉하게 여겼다.
숙제(叔弟) 자관(子管)과 종제(從弟) 자성(子聲)이 새로 잡은 터가 조용하기 때문에 다시 단란히 모였다. 이 동리(洞里)는 종형님[자생씨(子笙氏)]이 성주(星州) 평촌(坪村)에 옮겨온 곳이다. 이는 외진 곳을 취하여 생리(生利)를 취하려는 것이 아니다. 난세에 떨어져 사는 것은 더욱 난감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