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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9월[九月]

24일

막내 누이동생 여실(呂室)이 우례(于禮)할 적에 내가 데리고 갔다. 이른바 상객(上客)과 교전비(轎前婢) 모두 도보로 [말을 타고 가면 도인(道人)들이 말을 탈취해 가므로 혼인하는 집안의 사람들이 모두 도보로 갔다.] 가니 수촌(樹村) 역시 비류가 많아서 누이 집안도 날마다 도망가서 피하는 것을 일삼았다고 한다.

25일

최법헌(崔法軒)이 군사를 일으키라는 내용으로 김천(金泉) 편집강(片執綱, 보언)에게 통지를 하자, 편집강이 각 곳의 해당 접주에게 사통(私通)을 보냈다. 본읍(本邑, 김산군)의 경우 강주연이 죽정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배군헌은 신하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김정문은 기동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강영은 하기동(下耆洞)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권학서는 장암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조순재는 봉계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장기원은 공자동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여러 고을을 횡행하여 곡식과 말을 빼앗고 창과 검을 거두어 기염이 더욱 높아졌다. 비록 1냥의 돈과 1자의 베라도 몽땅 빼앗아 갔다. 동학도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목을 끌고 협박하여 따르게 하였다. 협박을 당해 어쩔 수 없이 따르는 자가 매우 많았다. 성찰(省察)을 큰 소리로 부르며 ‘빨리빨리 속자(俗子)를 그물질해서 와라. 힘이 있는 자는 장차 선두에 세우고 문장을 짓는 사람이 있으면 서기(書記)로 들어오게 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속자는 산에 올라가서 도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며칠 동안 노숙하면서 성찰을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사나운 호랑이보다 더 무서워하여 발을 땅에 딛지 못할 정도였다. 어찌 하겠는가.
김정문(金定文)이 먼저 선두로 기포하여 곧바로 선산부(善山府)에 다다랐다. 선산부의 아전들이 몰래 일본병사를 청하고서 성문에다가 총을 쏘니, 도인들이 내부에서 스스로 혼란에 빠지고 총에 맞아 죽은 자가 몇 백명인 지 모를 정도였다. 그리고 성을 넘다가 떨어져 죽은 자가 태반이었는데, 김정문의 포솔 중 죽은 자는 15명이라고 한다. 이 기별이 들린 이후로 각 곳의 접주들이 머뭇거리며 마음대로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였는데, 작폐는 더욱 심하였다.
강영이 도소를 설치하여 그 수접(首接) 이주일(李柱一)[선산(善山) 파계인(巴溪人)]을 몰래 사주하여, 그 사위 진사 여제동(呂濟東)[도사(都事) 영필(永弼)의 조카이고 진사 영근(永根)의 아들]을 붙잡아서 형틀을 채우고 구타하고 협박하여 동학도에 들어가게 하였다. 제동의 숙부와 여러 사촌들이 뒤따라가서 그 문에 이르러 이어서 통곡하면서, “조카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조카를 대신하여 나에게 죄를 주시오”라고 하니, 이주일이 말하기를, “400금을 빌려 주시오”라고 하였다. 여영필은 자주 도인의 요구를 겪어서 집에 한 푼의 돈도 없다고 하였다. 강영은 거짓으로 조사하는 척하면서 옆으로 40금으로 마감하였다. 여영필이 말하기를, “소로 대신 보내겠소”라고 말하고, 손수 그 조카의 결박을 풀고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곧장 농우(農牛)를 끌고 와서 보냈다고 한다. 마음의 변함이여. 강영이 이러한 일을 차마할 수 있단 말인가.

주석
우례(于禮) 경주 양동에 사는 여주 이씨들은 회재 이언적의 후손들이지만 농민전쟁 당시 동학에 많이 입도해 활동했다. 주로 서족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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