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연락처
기념재단
TEL. 063-530-9400
박물관
TEL. 063-530-9405
기념관
TEL. 063-530-9451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료 아카이브 로고

SITEMAP 전체메뉴

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8월[八月]

초 3일

의복을 변경하라는 관문(關文)을 여러 읍에 보내어 창의(氅衣)를 없애고 두루마기를 입고 실띠를 매는 것을 시제(時制)로 삼았다.
당시 동학이 더욱 성대해져 더럽혀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우리 고장의 괴수는 바로 죽전(竹田) 남정훈(南廷薰), 진목(眞木) 편보언(片輔彦)·편백현(片白現)이라는 자들이다.
죽정(竹汀) 강주연(康柱然), 기동(耆洞) 김정문(金定文)[감호정(鑑湖亭) 고자(庫子)], 강평(江坪) 도사(都事) 강영(姜永), 봉계(鳳溪) 조순재(曺舜在), 공자동(孔子洞) 선달(先達) 장기원(張箕遠), 신하(新下) 배군헌(裵君憲), 장암(壯岩) 권학서(權學書)가 접주(接主)가 되었다. 포덕(布德)이라고 칭하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유혹하여 말하기를, “동학도에 들어오면 난리를 피할 수 있고 굶주림을 면할 수 있다. 동학도에 들어오지 않는 자는 모두 죽을 것이다”고 하였다. 아, 저 지각이 없는 사람들이 일시에 모두 동학도에 들어가는 것이 마치 물에 젖고 불이 타게 하는 것과 같았다. 아비가 제 자식을 금지할 수 없었고 형이 그 아우를 금지할 수 없었다. 손으로 죽장(竹杖)을 끌고 목에는 염주(念珠)를 메고, 무리를 이루고 떼를 지어 마을을 침략하고 돈과 곡식과 베와 비단을 탈취하였다. 사가(私家)의 노예들이 상전을 구타하고, 하인이나 하천민이 사대부를 매질하며, 작은 원한이라도 반드시 되갚고 예전의 은혜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람들 중에 받아내기 어려운 빚이 있으면 반드시 받아내서 나누어 먹고, 파내기 어려운 무덤이 있으면 반드시 파내어 위엄을 보였다. 동학도에 들어가지 않은 자는 꼬투리를 잡아 지목하여 속자(俗子)로 도(道)를 훼손한다고 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가서 곧장 악형(惡刑)을 행하여 머리가 깨지고 뼈가 부러지는 자가 있었다. 그 악형을 견디지 못하여 속전(贖錢, 죄를 면해주는 돈)으로 몇 냥을 주면 이를 통해 풀어주었고, 가난한 자는 아무리 도를 훼손하였더라도 그냥 내버려두었고, 이름 없는 자는 비록 면박을 하더라도 그냥 내버려두었다. 부자(富者)나 이름 있는 자만이 그 피해를 당하였다.
봉계(鳳溪) 조승지(曺承旨)[시영(始永)] 정도사(鄭都事)[운채씨(雲采氏)], 기동(耆洞) 여도사(呂都事)[영필(永弼)], 여감역(呂監役)[위룡씨(渭龍氏)], 배헌(裵瀗) 등 여러 집안이 재산만 손상이 있을 뿐만이 아니라 그 사이 모욕을 당하니 그 끝이 없을 지경이었다. 여감역(呂監役) 어른은 또 선산에 변고를 당하여 윤자(胤子, 장자) 영소(永韶)가 구타를 당하여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니 피해를 당한 사람들 중 더욱 심한 경우이다. 그 외에 아침에 밥을 먹고 저녁에 죽을 먹는 집안이라면 욕을 당하지 않은 집이 없었다. 우리 역시 신촌(新村)의 족인(族人)에게 욕을 당하고 30금(金)의 손해를 받아서 분한 마음이 끝이 없었다. 어찌하여 일종(一種)의 사학(邪學)이 이와 같이 극히 심하단 말인가. 한 고을이나 한 도(道) 뿐만이 아니라 조선 팔도가 모두 그러하다고 하니, 이 역시 시대의 운수에 관계된 것이다.

초 6일

새 사또 박(朴)[준빈씨(駿彬氏)]이 군에 부임하였다. 새 사또는 바로 영성군(靈城君) 6대손으로, 우리 집안과 세의(世誼)가 있다.
금년의 가뭄이 병술년(丙戌年, 1886)보다 백배나 심하여, 봄부터 가을까지 한번 쟁기질할 비도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대파(代播)할 수도 없었고, 마실 우물도 모두 마를 지경이 되었다. 농사 상황이 이미 큰 가뭄으로 결판이 났다. 다른 해와 비교해보면 사람들이 모두 예비로 구황(救荒)을 대비하는 방도가 있었는데, 격동하는 시대적 상황에 연유하여 비록 한 달치 양식이 없어도 모두 밥을 먹고 죽을 먹지 않았다.
작년 가을 막내 숙부님의 장례식을 치르고 기산(箕山) 문총(文塚) 계단 아래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이번달 25일 무덤주인이 와서 협박하며 말하기를 “지금 즉시 파가도록 하시오. 파가지 않으면 내가 응당 도인을 거느리고 와서 파가겠소!”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26일 즉시 기산 남쪽 기슭 임좌(壬坐)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애통함을 어찌 말할 수 있으리오.
전해 들으니, “일본인이 점점 더 많이 일본에서 나왔는데, 몇 천 명인 줄 모를 지경이다. 군량과 병기를 배로 운반하여 왔는데, 기후가 가물고 수심이 얕아 배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자 우리나라 사람들을 시켜서 모래를 파서 배를 움직이게 하니, 그 폐해가 막심하였다. 경성에 있는 일본인이 청나라 군사를 방어하려는 뜻으로 평안도에 내려가다 임진강에서 유진(留陣)하여 서울에 있는 일본인이 거의 없다”고 하였다.
근자에 동학도가 점점 성대해져 이른바 편보언(片輔彦)이 ‘도집강(都執綱)’이라고 칭하고 김천 시장에 도소(都所)를 설치하였다. 동학도에 들어온 자는 그 성명을 기록하고 유사(有司)를 나누어 정하였는데, ‘접주(接主)’, ‘접사(接司)’, ‘대정(大正)’, ‘중정(中正)’, ‘서기(書記)’, ‘교수(敎授)’, ‘성찰(省察)’( )등의 명칭이 바로 이것이었다.
최법헌(崔法軒)의 인장(印章)을 명지(名紙) 위에 찍어서 주면서 ‘예지(禮紙)’라고 칭하였다. 동학도에 들어온 자는 모두 예지 한 폭이 있었다. 상놈의 경우 모두 성찰로 임명이 되었다. 성찰은 마치 관가의 차사(差使)와 같았다.
해당 접주는 날마다 포덕(布德)을 일삼았는데, 각기 포솔(包率)이 있었다. 충청포(忠淸包)에 들어간 자는 충청포(忠淸布)라고 칭하고, 상공포(尙公包)에 들어간 자는 상공포(尙公布)라고 칭하고, 선산포(善山包)에 들어간 자는 선산포(善山布)라고 칭하고, 영동포(永同包)에 들어간 자는 영동포(永同布)라고 칭하였다. 접주의 경우 안장을 갖춘 좋은 말을 타고 큰 깃발을 세우고 포명(包名)을 적었다. 포졸(包卒)의 경우 모두 총과 창을 지니고 뒤를 따라 다녔다. 나가건 들어오건 간에 총을 마구 쏘았다. 만약 저녁에 들어올 경우에는 큰 소리로 성찰을 불러 마을마다 햇불을 들게 하니, 그 불빛이 하늘과 이어져, 기염이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카락이 쭈뼛 설 지경이었다. 어느 곳을 따질 것 없이 사가(私家)의 노예들이 대부분 동학도에 들어가 그 상전인 자들이 값을 받지도 않고 속량하였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망칙한 피해를 당하였기 때문에 우리 세 집안의 노비 역시 세상에 따라 방출하여 수하에 한 명도 없어서 근심스럽고 답답하였다.
성주(星州) 여러 아전들이 동학도 수십 명을 죽였는데, 훗날의 보복이 두려워 인근 고을 가까운 동민(洞民)들을 불러 모아 밤낮으로 지키게 하였다. 동학도가 일제히 일어나 포솔(布率)이 각자 총과 창을 들고 사방에서 운집하여 거의 만여 명이 되었는데, 대마시(代馬市)에서 유진하였다. 아침 저녁의 음식과 물품을 부근의 촌에서 공급하게 하니, 백성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었다. 성주목사 오석영(吳錫永)이 겁에 질려 밤중에 도망치고 아전들 역시 사방으로 흩어졌다. 비류가 갑자기 성주부 안으로 돌격해 쳐들어와 일시에 불을 지르니, 천호(千戶) 가까운 인가에서 삼일 동안 계속 화재가 났다. 화재 연기의 길이가 백여 리에 뻗쳐 있었다. 불에 타지 않은 곳은 오직 공해(公廨) 뿐이었다. 여러 아전들의 집에서 돈, 재물, 베, 비단, 보화, 의복 등을 도둑맞지 않은 것이 없었다. 땅에 묻어놓은 물건은 땅을 찔러 보아서 감추어 둔 것이 있으면 꺼내어서 조금도 남겨둔 것이 없다고 한다. 소문이 매우 위태롭고 두려웠다.
지례 현감(知禮縣監) 이재하씨(李宰夏氏)가 비류(匪類)를 금지하고자 하여 몇 사람을 결박해서 형틀을 채우고 엄히 가두었다. 그 때문에 저 비류들이 사방에서 모여 곧장 지례 동헌(東軒)으로 쳐들어가, 본관(本官, 지례군수 이재하)을 둘러싸고 때려 거의 머리가 부서질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변괴가 극도에 달하였다. 이후로 각 고을의 수령들이 더욱 두려워 금지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안의·거창·함양 세 읍의 수령은 힘을 모아 엄히 단속하여 소란스럽게 떠드는 백성들을 잡아다가 번번이 죽였다. 이 때문에 세 고을은 동학도들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당시 가족을 거느리고 세 읍으로 피난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우리 고장 여감역(呂監役)[위룡씨(渭龍氏)], 배척숙(裵戚叔)[선영씨(善永氏)], 지례(知禮)의 이도사(李都事)[현삼(鉉參)], 이장(李丈)[현문씨(鉉汶氏)], 이감역(李監役)[성문씨(性聞氏)], 선산(善山)의 허방산(許舫山)[훈씨(薰氏)] 등 여러 집안이 한 밤중에 도망갔는데,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고 한다.
죽정(竹汀) 강주연(康柱然)의 포솔 중 상놈 최판대(崔判大), 상놈 차돌이(車乭伊), 이치윤(李致允)이라는 자가 방자하기가 매우 심하였다. 최판대는 일찍이 광수(廣水) 여해수씨(呂海叟氏) 집안에 무리를 거느리고 들어가 여씨 어른을 결박하고 황각(黃角) 주점에 끌고가서 마구 때려 죽였다. 이 때문에 그의 아들 정옥(廷玉) 형제가 최판대를 죽여 복수하였다. 당시 온갖 변괴가 일어났는데, 매원(梅院) 광리(廣李)의 노비 반란과 경주(慶州)의 양리(陽李) 족속의 반란은 모두 지극한 변괴이다.

주석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받은 봉작(封爵)의 명칭이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종사관으로 참여하여 평정한 공으로 영성군에 봉해졌다.
속량 대가를 바치고 노비의 신분을 면해주는 것. 대가의 돈을 속전이라 한다.
여감역(呂監役)[위룡씨(渭龍氏)], 배척숙(裵戚叔)[선영씨(善永氏)], 지례(知禮)의 이도사(李都事)[현삼(鉉參)], 이장(李丈)[현문씨(鉉汶氏)], 이감역(李監役)[성문씨(性聞氏)], 선산(善山)의 허방산(許舫山)[훈씨(薰氏)] 등 지례에는 여씨와 연안 이씨, 성주에는 배씨, 선산에는 허씨, 금산에는 화순 최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향반으로 위세를 부렸다. 감여 도사 등은 벼슬이름이다.
경주(慶州)의 양리(陽李) 경주 양동에 사는 여주 이씨들은 회재 이언적의 후손들이지만 농민전쟁 당시 동학에 많이 입도해 활동했다. 주로 서족들이었다.
이 페이지에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을 반영하는 재단이 되겠습니다.

56149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문화체육관광부 전라북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