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五月]
14일
일본 장수가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경성을 허물고 돌진하여 남산을 점거하였다. 청나라 장수가 일본 장수를 질책하기를, “귀국(貴國)이 무엇 때문에 흉기를 소지하고 타국에 들어와 소동을 일으킨단 말이오. 우리와 함께 전투를 벌입시다”라고 하였다. 일본 장수가 사과하며 간절히 강화(講和)를 구하였지만, 원대인(袁大人, 원세개)이 들어주지 않았다. 대개 원대인이 일본군사를 한번 치고자 한 것은 다른 연고가 아니라 동학난에 민혜당(閔惠堂)[영준(泳俊)]이 몰래 일본군사를 청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혜당을 싫어하여 일본군사에게 치고자 한 것이다.
18일
원대인이 일본군 병사와 접전하려는 의도로 처자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문 밖에서 포진하니, 한양의 인심이 더욱 진동하여 남부여대하고 사람이 탄 가마와 재화를 실은 말(馬)로 인하여 사대문이 가득 찼다.
22일
큰 뱀이 전정(殿庭)에 나타나니 매우 상서롭지 못한 징조이다. 이 때문에 임금께서 장차 경복궁으로 환어(還御)할 뜻이 있었다.
23일
각국 공사원(公事員)을 모아[청국, 일본,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미국] 대내(大內)에 연회를 마련하여 강화를 청하였다고 한다.
24일
대전(大殿)께서 경복궁으로 환어하였다. 그날 밤 동관(潼關) 궐내에 수많은 군사의 고함소리와 병마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 대궐 아래 근접한 인가에서 놀라 일어나 둘러보니 고요하여 사람의 소리라곤 들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일이 서너 차례가 발생하여 사람들이 잠을 잘 수 없었다. 이들 병사는 일본군 병사로, 천여 명이 만리창(萬里倉)에 들어와 점거하였고, 또 수천 명이 아산(牙山) 태초도(太初島)에 주둔하였다고 한다.
27일
청나라 사람으로 한양에 와서 거주한 자들이 가게를 철거하고 떠나갔다. 이날 밤에 일본병사가 밀봉한 편지를 가지고 가서 혜당(惠堂, 민영준) 집안에 보냈다. 혹자는 일본병사가 군량미 3만석을 요청하였다고 하였다. 혹자는 일본병사가 검을 가지고 혜당을 위협하여 혜당은 야반에 황급히 궐내로 들어가 새벽이 되어도 나오지 않았고, 은밀히 사람을 뽑아 보내어 보화를 싸고 가족을 거느리고 문을 나가 온 집안이 비어 있었고, 단지 문을 지키는 졸개 2∼3인만 있었다고 한다.
봄부터 지금까지 계속 가뭄이 들어 비가 내리지 않아 한답(旱畓)에 이앙하지 않았다.
청나라 흠차대신(欽差大臣) 왕봉조(汪鳳藻)가 일본 외무성에 조회(照會)한 글이 다음과 같다.
지난번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의 전보를 받아보니, 그 안에 광서 11년(光緖 11년, 1885년)에 중국과 일본 두 나라가 맺은 조약 안에 ‘장래 조선에 변란이 생기면 중국은 조선에 군대를 보낸다. 그 전에 중국은 반드시 먼저 일본에게 공문을 보내 알리고, 사건이 평정되는 즉시 군대를 철수하고 다시 머물러 방어하지 않는다’라는 등의 말이 있습니다. 본 대신이 지금 조선에서 보낸 전보를 받아보니, ‘전라도에 속한 지역의 민습(民習)이 흉악하여 동학교가 무리를 모아 고을을 공격하여 함락하였습니다. 또 북쪽으로 전주를 침범할 것 같습니다. 전에 훈련원 군사를 보내 섬멸하려고 하였는데 승리하지 못하였습니다. 만일 시일이 오래 되어 세력이 커진다면 상국(上國)에서 우려하는 일이 더욱 많을 것입니다. 또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두 내란이 저희 나라에서 발발했을 때 모두 중국 군사의 도움에 의지하여 대신 소탕해 주었습니다. 이에 이러한 전례에 따라 간청하여 중국의 군대를 일으켜서 대신 흉악한 무리들의 변란을 철저히 평정하고 즉시 개선하시고, 감히 계속 머물러 주둔하기를 청하여 천자의 군대를 오래도록 수고롭게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본 대신이 조회문에서 형세가 매우 다급함을 보고 또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여 원조하는 것은 우리 조정이 속방(屬邦)을 보호하는 옛 전례라고 여겨 이로써 즉시 황제에게 아뢰니, 황제께서 명령하시기를 ‘직예제독(直隷提督) 섭지초(葉志超)는 정예병을 선발하여 거느리고 조선의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로 달려가서 속히 재앙과 난리를 평정하여 속방의 경계를 다시 평안하게 하라. 조선에 머물러 있는 각국의 관리와 상인들도 모두 생업에 편안하게 하라. 또 일을 끝낸 후에 이어서 하루 빨리 군대를 철수시키고 다시 머물러 있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속히 조약을 살펴보고, 전보로 귀 대신은 빨리 일본 외무성에도 조회해 주시기를 아울러 바란다고 했습니다. 이에 준하여 문서를 보냅니다.
일본이 보낸 조회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조회하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 외무대신의 공문을 받아보니, 그 내용 중 아력(我曆, 일본력) 본년 5월 초7일에 동경(東京)에 주재한 청국 흠차대신 왕봉조가 보낸 문서의 내용 중 ‘파병하고 원조하는 것은 우리 조정이 속방을 보호하는 구례(舊例)이다’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이를 살펴보니, 우리나라 정부는 처음부터 조선의 자주독립국가임을 인정하였습니다. 명치(明治) 9년 2월 26일에 정한 양국 수호조규(修好條規) 제1관(款)을 살펴보면, 제일 먼저 조선국이 자주국이기에 일본국과 평등하다는 권리가 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지금 청국 흠차대신이 보낸 문서를 살펴보니, 마침내 서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생각건대 이 사안은 일본과 조선 두 나라가 교제상에 있어서 관계된 점이 매우 중대합니다. 과연 조선정부에서도 스스로 속방을 보호한다는 청국의 말을 인정하는지 여부를 신속히 명백하게 물어보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 문서를 받들고 청국의 흠차대신이 보낸 공문을 적어서 조회하오니 아울러 내일까지 즉시 이번달 29일 안에 회의를 거쳐 결정하시어 회답하심을 지극히 요청합니다.
이 조회에 답한 문서는 다음과 같았다.
조복(照覆)하는 일입니다. 아력 본월 25일 귀측에서 보낸 문서의 내용을 보니, 속방을 보호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를 받고 살펴보니, 병자수호조규 제1관(款) 안에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한 구절은 본국이 조약을 맺는 이래 두 나라의 교제하고 교섭하는 사안에 대해 편안히 자주와 평등의 권리를 가지고 처리한 것입니다. 이후 조선이 중국에 구원병을 청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자유 권리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조선과 일본이 맺은 조약에는 추호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본국은 단지 조선과 일본이 정한 조약이 진실로 준수되는지 인지하려는 것입니다. 또 본국의 내치(內治)와 외교(外交)는 본국의 자유로 행한다는 것은 중국이 평소부터 알고 있는 점입니다. 중국 왕대신(汪大臣)의 조회와 크게 다르다는 여부에 관한 사안은 모두 본국과는 아무 관련이 없고, 본국과 귀국이 교섭하는 방도는 단지 두 나라가 조규에 비추어 처리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문서를 갖추어 조복하오니 귀 공사께서는 번거롭지만 장차 살피시어 이를 귀국의 외무대신에게 전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