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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4월[四月]

초 4일

임금께서 동학교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감영에서 매우 엄격히 신칙하여 여러 고을에 관문(關文)을 보내니, 동학의 무리들이 조금 잠잠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전해 들으니, 전라도 비류(匪類)는 더욱 많아져 온 도에 가득하여 관청을 불태우고 탐리(貪吏)를 죽이니, 그 기염이 매우 번창하였다. 게으르고 놀고먹는 백성들과 두건을 두른 불량배들이 다투듯이 동학에 들어갔다. 각 읍의 군기(軍器)를 탈취하고 수만 명이 떼를 지어 모이니, 전라감사[김문현씨(金文鉉氏)]가 군사를 출동시켜 접전하였다가 패배하고 돌아왔다.

13일

성주(星州) 묵방(墨坊)에서 강회(講會)하는 날이다. 사미(四未) 장선생(張先生)[함자는 복추(福樞)이고, 은일(隱逸)로 도사(都事)를 지냄]이 만년에 이 땅을 정하여 지팡이 짚고 거닐며 사셨다. 각 읍의 유생이 수계(修禊)하고 강학하는 뜻으로 통문을 발하여 일제히 모였기 때문에 나 역시 가서 참여하였다. 회원이 거의 3백여 명에 이르렀다. 아침 이후 송단(松坛) 위에서 개좌(開座)하였다. 먼저 향약(鄕約)을 행하였고, 오후 개강(開講)하였다. 나는 직일(直日, 숙직)이 되었기 때문에 그 문답을 기록하였다.
월초에 대전(大殿, 고종)께서 동관(潼關) 구궐(舊闕)로 이어(移御)하셨다.

16일

전봉준이 동학교인 수천 명을 거느리고 전라감영을 침범하자 전라감사가 도망쳤다. 그 무리들이 성중에 돌진하여 선화당(宣化堂)을 점거하고 사대문 안에 장막을 설치하니 그 날카로운 기세를 누구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초토사(招討使) 홍재희(洪在喜, 喜는 羲의 오기훈)가 군사 5백 명을 거느리고 곧장 전주에 당도하여 접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여 한양이 진동하였다.
또 청나라 장수를 보내 구원하게 하였는데 청나라 장수가 1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의 성문 밖 4곳에 포(砲)를 매설하고 동학의 무리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동학의 무리들이 밤에 문을 열고 일제히 나오자 청나라 군병이 사방에서 방포(放砲)하여 사상자가 무수히 발생하였다. 아침이 밝아오자 살펴보니, 죽은 자는 모두 영저(營邸)의 여자들이었다. 이는 한(漢)나라 진평(陳平)이 밤에 여자들을 성 밖으로 먼저 내보내 적을 속인 계책이 아니겠는가. 그 괴수 전봉준은 이 틈을 타고 도망갔다. 후에 전봉준이 또 남은 무리들을 모아서 여러 고을을 침략하였다.

주석
구궐(舊闕) 동관은 경복궁 옆에 있는 관문. 시정 사람들은 경복궁을 창덕궁과 구분해 옛 대궐이라 불렀다.
16일 이 16일조 일기 내용은 동학농민군이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하고 정부군과 대치하다 5월 8일 화약을 맺고 전주성을 빠져나온 일련의 사건을 두고 한 말이다. 따라서 16일은 4월 16일이 아닌, 5월 16일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청나라 장수가 1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의 성문 밖 4곳에 포(砲)를 매설하고 동학의 무리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전주전투에서 청군은 소대 규모로 참가했으나 직접 전투를 벌이지는 않았다. 청군은 농민군의 동정을 살피려 홍계훈을 따라 왔다.
한(漢)나라 진평(陳平) 전한의 정치가. 한 고조를 도와 전략전술을 짜낸 지략가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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