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연락처
기념재단
TEL. 063-530-9400
박물관
TEL. 063-530-9405
기념관
TEL. 063-530-9451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료 아카이브 로고

SITEMAP 전체메뉴

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3월[三月]

초 1일

집으로 돌아가려고 출발하였다. 중제는 또 내려가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사월(沙月)에 거주하는 김형(金兄) 낙여보(洛汝甫, 甫는 미칭)와 동행하기로 약속하였다. 한양의 상황이 갈수록 근심스럽고 참혹하였다. 청국인, 왜국인, 프랑스인, 미국인이 차츰 더욱 와서 거주하여 전물(廛物)을 매매하니 물가가 배나 올랐다. 밥 한 상(床) 가격이 5∼6전(錢)에 이르고 술 한 사발에 4,5푼, 초(草) 1속(束)이 2푼으로, 물가가 이처럼 폭등하니 곤궁한 선비는 하루도 머무를 수 없다.
남촌(南村)에 거주하는 홍종오(洪鍾五, 五는 宇의 오기)라는 자가 역신(逆臣) 김옥균(金玉均)을 따라 왜국(倭國)에 들어가 몇 해 동안 지냈었다. 이 해 봄에 김옥균을 유인하여 상해관(上海關)에 가게 하여 참수(斬首)하였다. 의주부윤(義州府尹)이 조정에 아뢰어 보고하였다. 초2일 오시(午時)에 김옥균의 시신이 도성에 들어왔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다행스럽게 여겼다.

초 2일

낙여형(洛汝兄)과 출발하여 드디어 조령(鳥嶺)을 향했는데 험준한 이 고개를 넘으니 촉도(蜀道) 진교(眞嶠) 남쪽 후문(喉門)보다 심하다.

11일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동학이 크게 번성하였다. 영남은 최시형(崔時亨)이라는 사람이 자칭 법헌선생(法憲先生, 憲은 軒의 오자)이라고 하고 수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충청도 보은(報恩) 장내를 점거하였고, 전라도는 전봉준(田鳳俊, 全琫準의 오기)이라는 자가 ‘녹두장군(綠豆將軍)’이라고 칭하고 또한 그 무리를 거느리고 전주 등지를 분할해 점거하니 인심이 동요되어 마치 물이 끓는 듯하였다. 대개 동학(東學)이라는 명칭이 과연 어떤 물건인가. 자칭 도인(道人)이라는 자가 수십 글자의 주문을 외워서 신통하게 되면 헤아릴 수 없는 조화를 부린다고 한다. 어리석은 백성들을 꾀이고 한 세상을 현혹시키니 무지한 자와 무뢰배들이 점점 빠져들었다. 동학교에 들어간 자는 양반과 상놈의 구분이 없고 비록 피공(皮工)이나 무녀(巫女)와 같은 천민들이 사대부와 함께 들어가면 서로 공경하고 절하면서 ‘접장(接丈)’이라고 부르고 심지어 사가(私家)의 노예들이 그 상전에게도 그렇게 대하였다. 전적으로 무리를 모으는 것에 주로 힘썼다. 전날 감정이 상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지금 보복하였고 오랫동안 갚지 않은 빚을 받아내고 가까이 있는 남의 무덤을 파내었다. 그들이 제멋대로 호령을 발하였지만, 감사와 수령이 수수방관하며 금지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폐해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 명문가와 거족(巨族)들이 욕을 당하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였다.

20일

내신하(內新下)에 거주한 송낙현(宋洛玄)이라는 사람이 동학에 붙어 그 무리 수십 명을 거느리고 와서 나를 협박하기를, “이 동네 가운데 복사답(伏沙畓) 4두락지를 몇해 전에 사서 경작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지금 4년 동안 한 번도 씨를 뿌리지도 않았는데 허복(虛卜)을 징수하니, 지금 단연코 그 논을 도로 물리고 그 결수를 받아내겠다”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돈을 주고 산 논을 도로 물리면서 결수(結數)를 받겠다는 말은 모두 억측이다”라고 하니, 그 무리들이 강제로 협박하며 구타하였다. 그 사이 수모를 당한 일이 끝이 없을 지경이었지만 분노를 설욕할 길이 없었다. 송(宋)놈의 소행은 죽여도 아깝지 않다.

주석
이 해 봄에 김옥균을 유인하여 상해관(上海關)에 가게 하여 참수(斬首)하였다. 홍종우는 1894년 3월 28일 오후 4시에 중국 상하이의 미국 조계지인 철마로(鐵馬路)에 있는 3층짜리 서양식 건물 동화양행(同和洋行) 2층에서 김옥균을 권총으로 사살하였다. 김옥균의 시체를 가져와 양화진에서 효수했다.
촉도(蜀道) 진교(眞嶠) 남쪽 후문(喉門) 촉도는 촉[지금의 사천성]으로 통하는 험난한 길을 말하는데 진교의 높은 봉우리 남쪽의 후문이 그 입구가 된다.
접장(接丈) 접장(接丈)은 접장(接長)의 오류이다. 동학농민군은 노소 귀천 남녀를 가리지 않고 서로 존대하는 평등의 용어로 ‘접장’이라 불렀다.
허복(虛卜) 땅을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 허위로 땅을 가진 것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 페이지에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을 반영하는 재단이 되겠습니다.

56149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문화체육관광부 전라북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