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八月]
20일
감시(監試)를 치르는 날이다. 경상우도의 시험장소는 초계(草溪)에 정해졌는데, 시관(試官)은 소론(少論) 조병승(趙秉承)이다. 과거 법규가 더욱 해이해져 조금도 공정한 도리가 없었다. 우리 고을에서 시험에 합격한 자는 7인이었다고 한다. 나는 마침내 응시하지 않았고, 중제(仲弟) 자적(子笛)은 봄 사이에 상경하여 이어서 한성시(漢城試)를 보았는데, “1소(一所)의 시관은 이헌영(李憲永)이고, 2소(二所)의 시관은 조희일(趙希一)이었다. 1소는 매우 공정하였으나, 2소는 공정함이 전혀 없어 파방(破榜, 과거시험 무효)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믐날 경무대(景武臺)에서 응제시(應製試)를 설행하였는데, 임금께서 친림하여 시(詩)·부(賦)· 표(表) 세 시제(試題)를 출제하였다. 중제가 내 이름으로 표(表)를 올려 감시 초방(監試初榜)에 입격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