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三月]
15일
나는 성주(星州) 무흘(武屹)에 가서 유계(儒契)에 들어갔다. 대문 가운데 적힌 향도유(鄕道儒)가 거의 70여 원(員)에 이르렀는데 의관이 의젓하여 완연히 한강선생(寒岡先生)의 유풍(遺風)을 보는 듯하였다.
16일
파좌(罷座, 폐회)한 후 6∼7명의 친구와 함께 수도암(修道庵)에 올라가 그대로 머물러 묵었다. 다음날 청암사(靑庵寺)에 도착하여 산수를 실컷 감상하니, 세상살이의 너더분한 일들이 사라지고 신선의 느낌이 갑자기 느껴졌다.
20일
고반동(考盤洞)에 들어가 동강선생(東岡先生)의 유계에 참여하였다. 우리 집안이 이 유계에 참여한 지 이미 오래 되었다. 선친이 일찍이 도청(都廳)의 직임을 맡았으나, 내가 모임에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동학(東學)이 크게 번성하였다. 한양부터 지방 고을까지 그 무리를 불러 모으고 왜적을 배척한다는 명분을 삼아 1만여 명이 한 곳에 모였다고 한다. 이는 재앙의 근원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