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년(1895)
1월에 참모관(參謀官) 이두홍(李斗弘)이 150여 명의 군병을 거느리고 경내를 순행하였다. 각처의 접주(接主)들로서 달아나 체포되지 않는 사람은 기찰(譏察)을 하여 붙잡았고, 강제로 동학에 들어간 자는 어루만져 안심시켰다. 우리 마을에 들어온 병정은 마을 사람들이 숙식을 제공하고, 참모관은 대손(大孫) 판관(判官) 집에 유숙하였다. 그런데 자식 긍석(肯石)에게 마침「파동도승전가(破東徒勝戰歌)」 한 편이 있었다. 참모관이 이를 보고 그 시를 좋아하였다. 소매에 넣어 가져갈 수 있도록 청하였는데, 서울에 이를 전파하기 위해서였다.
지난해 겨울부터 올봄까지 청나라 군사와 일본 군사가 중국 항구에서 교전하였는데, 죽은 일본 군사의 수가 수만 명이었다. 죽은 자의 머리는 일본 군사가 반드시 베어서 취하여 본국으로 송환하였다. 머리를 실은 화륜선(火輪船)이 십여 척이나 된다고 하였다.
갑신년 10월 변란을 일으킨 죄인 박영효(朴永孝), 김옥균(金玉均), 서광범(徐光範), 서재필(徐載弼)이 왜국(倭國)으로 도망갔다. 김옥균은 홍종우에게 살해를 당하였다. -위에 보임-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갑오년 6월 본국의 조정으로 돌아와 대신의 지위를 차지하고 국가의 정사를 마음대로 처결하였다. 크고 작은 모든 정무가 임금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박영효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이로부터 내린 정령(政令)은 우리 임금이 내린 정령이 아니었다.
6월 이후 박영효가 내무대신이 되었다. 10명의 대신은 모두 한 마음으로 협력했던 자였다. 우리나라로 하여금 청나라를 배반하고 자주국(自主國)이 되게 하여 모든 공문서와 관련된 것은 모두 ‘조(詔)’라 칭하고 ‘짐(朕)’이라 칭하였다. 연호의 경우 반드시 건양(建陽)이나 일본 연호를 사용하게 하였으니, 어느 조칙(詔勅)에 이웃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가. 비록 청국을 배반하고 왜국을 추종하려는 계책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이와 같이 강한 나무를 꺾듯이 한단 말인가. 중외(中外)의 백관(百官)과 유사(有司)의 관직은 모두 그 명칭을 바꾸고 그 수를 줄였다. 조정의 관직은 10명의 대신과 10명의 □□(원문결락)만 있을 뿐이었다. 주현(州縣)을 맡고 있는 관직은 관찰사, 참서관(參書官), 경무관(警務官) 뿐이었다.
앞에서 명령을 듣고 아래에서 거행하는 자는 주사(主事), 순검(巡檢), 순포(巡捕) 뿐이었다. 각 영문(營門)의 장신(將臣), 통사(統使), 병사(兵使) 이하 우 · 진(郵鎭), 승(丞), 우후(虞候), 첨사(僉使)의 관직이 모두 혁파되었다. 그들에게 지급되었던 녹봉의 물품이 개화당의 막비(幕裨)로 귀속되었다. 향원(鄕員), 이교(吏校), 예졸(隷卒)이라는 명칭이 모두 사라졌다. 그 실업들은 자연 상업쪽으로 갔다.
경향의 과거시험을 치르는 법을 폐지하였다. 이 때문에 시골에 사는 선비들은 바라는 바가 없어졌고, 명예와 이익을 위해 글을 읽던 자들은 실의에 빠져 시간만 보내며 노닐었고, 고금을 통찰하기 위해 글을 읽던 자는 간혹 스스로 좋아하며 글을 읽었다. 하지만 시간만 보내며 노니는 자는 많고, 스스로 좋아하는 사람은 적었다.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이를 근심하였다.
세공(稅貢)은 곡식으로 납부하지 않고 돈으로 납부하였다. 봉강(封疆)은 모두 도(道)를 나누고 읍을 나누어 한 가지 일도 변하지 않고 예전대로 있는 것이 없었다. 개화의 새로운 신법 80조를 판각하여 행회(行會)하였는데, 특별히 그 아래에 박영효가 주장하였다고 쓰여 있었다. 이를 본 사람들이 주장한 사람의 성명이 없더라도 누가 박영효가 한 짓인 줄 모르겠느냐고 모두 말하였다.
각 도의 여러 고을 관찰사, 참서관, 경무관은 모두 상관(上官)이었지만, 대대로 세록을 받은 사대부들은 원하지 않는 관직이었다. 그 직위에 임명된 사람들은 모두 중인, 서인, 시장상인, 서리, 반당(伴倘), 한량(閑良)과 산관(散官)의 부류들이었다. 그들은 또한 남보다 뛰어난 능력이 없었기때문에 아래에서 명령을 듣는 자들이 ‘너나 나나’하는 비교가 없을 수가 없었으니, 나라의 명령이 행해지지 않는 것은 형세상 진실로 당연한 일이었다. 뒤이어 패역의 행위가 있게 되었다. 본주로 말하자면, 순검(巡檢)이 관찰사의 뺨을 치고 병정(兵丁)이 경무관의 가슴을 쳤다. -본주 관찰사 이종원(李鍾遠), 경무관(警務官) □□□(원문결락), 참서관 이석령(李石齡)- 이를 미루어 보면, 여러 군(郡)의 상황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본주(本州) 청운동(靑雲洞)의 어떤 사람이 소를 팔아 돈을 가지고 돌아오던 중 저녁에 청운동 뒤 봉우리에 도착하였을 때 같은 동네 사람의 칼에 찔려 정신을 잃고 쓰러졌지만 다행히 죽지 않았다. 그래서 누가 칼로 찔렀는지 보고 알 수 있었다. 겨우 생명을 보전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사람과 동네사람들이 칼로 찌른 범인을 포박하여 관에 고발하였다. 그런데 관에서 말하기를, “네가 죽지 않았으니 범인에게 상명(償命)할 수가 없다. 빼앗긴 돈이나 되찾으면 다행이다. 집으로 가서 상처를 치료하라”고 하였다. 칼로 찌른 범인에게는 한 번의 태형(笞刑)도 가하지 않고 방면하였다. 또 본주 궁원(弓院)의 어떤 사람이 물건을 팔아 30냥을 받아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날이 저물었는데, 같은 동네 사람의 칼에 찔렸다. 하지만 죽지도 않았고 돈도 되찾았다. 청운동 사람이 당한 사건과 똑같았다. 칼로 찌른 사람이 도망가서 붙잡을 수 없었다. 그런데 소송하여 치죄하려고 하자, 관에서는 ‘목숨도 잃지 않았고 돈도 빼앗기지 않았는데 어찌 시끄럽게 하느냐’라고 하고서 물리치고 묻지 않았다. 이 일을 듣고 평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을 칼로 찔렀으나 죽지 않는 것은 찔린 사람의 다행이다. 칼에 찔려 죽지 않은 것은 찌른 사람이 인자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데 어찌 죽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 불인한 짓을 한 자에게 죄를 묻지 않는가. 개화(開化)의 법률이 진실로 이와 같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6월 14일 박영효가 장차 왜국 군사와 대궐을 침범하여 헤아릴 수 없는 변란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서광범(徐光範)이 조짐을 알고 서양 영사관(領事館)에 가서 말하였다. 서양 관원이 이 말을 듣고 즉시 서양 군병에게 박영효를 붙잡게 하였다. 그러나 박영효가 달아나서 사로잡지 못하였다. 그 후에 들으니 또다시 왜국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8월 20일 일본 병사 수백 명이 내전(內殿)에 난입하여 변란을 일으켜 중궁전이 참혹한 해를 당한 것은 역사서에 없었던 변고였다. 25일 중궁을 폐위하는 조서를 각도에 반포하였다. 만백성의 논의는 적신(賊臣)이 조서(詔書)를 위조하였다고 의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10월 22일 중궁전의 복제(服制)을 기년(朞年)으로 정하여 성복(成服)하라는 공문이 내려와서 신민(臣民)들이 통곡하고 상복을 입었다.
28일 갑자기 의병 수천 명이 대전 유성(儒城)에서 공암(孔岩)으로 와서 읍부(邑府)를 향해 빨리 달려갔다. 경유한 마을이 모두 소동이 일어났다. 얼마 뒤에 땅거미가 질 무렵 도로 퇴각하여 각기 흩어졌다. 혹은 왕촌(旺村)으로부터 내흥령(乃興嶺)을 넘어 본동(本洞)에 들어온 자가 수십 명이었다. 그 이유를 들으니, 중궁전을 복수하기 위한 의리에서였다. 피해를 당한 것은 개화파 때문이었다. 당시 관원이 된 자는 모두 개화파 중인(中人)이었기에, 이러한 행동이 있었던 것이다. 의병이 군사훈련을 익히지 않았고 병장기가 날카롭지 않아 관군에 쫓기게 되었다. 창의(倡義)한 자는 한양 사람인 문소모(文召募)였다.
11월 상순 이후 단발령이 매우 급박해졌다. 이는 바로 개화를 주장하는 대신이 임금의 명령을 위조한 것이다. 경병 수백 명을 내려 보내서 본도에서 열읍을 순행하여 단발을 재촉하니, 인심이 크게 동요하였다. 15일 임금님께서 단발을 당하였고 운현대감(雲峴大監, 대원군) 역시 단발을 당하였다. 역신(逆臣)의 핍박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다. 매우 통곡할 일이다.
소위 본도의 관찰사, 참서관, 영사관은 모두 중인(中人)이었다. 이들 모두 단발을 하였다. 거느리던 관속과 군사를 영중(營中)에 불러 모아서 일시에 모두 단발을 하였다. 그 군대를 시켜 민간에서 강제로 단발하게 하였다. 군대가 단발을 빙자하여 협박하고 빼앗는 것이 위급한 난리보다도 심하였다. 경내 조신(朝臣)조차도 길가에서 욕을 당하고 여행객이 탈취를 당하는 일이 이미 말할 필요조차도 없었다. 그리고 백성들이 대낮에 곡하는 소리를 차마 보고 들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예의(禮義)를 지키는 나라에 태어나 부모의 손에서 길러졌으니, 차라리 죽을지언정 단발하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민심과 여론이 어찌 그렇지 아니 하겠는가. 혹 숨거나 혹 도망가는 등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단발을 당한 사람 중에는 혹 머리주변에 몇 가닥 머리카락이 남아있어 집에 있을 때는 이 머리카락을 묶어 상투를 만들고 집을 나설 때에는 풀어서 망건으로 그 머리를 감쌌다. 이를 보고 본뜬 사람도 많았다. 비록 몇 가닥 남아있는 머리카락을 보전하더라도 이 역시 단발을 한 것이니 오십보 백보로 위안을 삼기에 충분할 수가 없었다. 그 구차한 계획을 돌아보면 그래도 매우 원통한 심정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동으로 말하자면, 면장(面長) 박□□(원문결락)이 와서 단발령을 전하자 마을사람들이 모두 어리둥절하였다. 내가 마을 사람과 함께 말하기를, “우리 동방 산천의 영령은 다른 나라와는 다르다. 영령이 있는 바는 백성들이 믿는 바에 은미한 이치는 영령에게 듣고, 드러난 명령은 임금에게 들을 뿐이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단발하신 것이 비록 전하의 본심이 아니지만 백성 된 입장에선 기쁨도 따라야 하고 통곡도 따라야 한다. 그런데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머리카락을 삭발하는 것이 어찌 조종(祖宗)에 고함이 없겠는가. 동임(洞任)은 동의 우두머리이다. 장차 모일(某日)을 기하여 먼저 삭발하면, 동임이 명령을 따르는 모습을 족히 보여준 것이니, 나머지 사람들은 원근으로 다니는 자가 일제히 돌아오기를 기다려 차례대로 삭발하면 불가한 것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면장 또한 이 말을 듣고 괜찮다고 여겼다. 이처럼 잠시라도 조금 시간을 질질 끌고자 한 것은 반드시 단발하지 않아도 될 일의 단서가 생길 것 같은 생각이 마음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었기 때문이다. 며칠 뒤에 팔도가 시끄러웠다. 의병이 봉기하여 개화를 주장하는 신하들이 도리어 두려워하여, 우선 단발령을 정지하라는 명이 있었기 때문에 한 사람도 단발을 당하지 않았다.
12월 당시 의병이 사방에서 봉기하여 본도의 좌도(左道) 맹저평(孟抵平)이 제천(堤川)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영남 추경덕(秋敬德)과 추치명(秋致明)이 그 고을 거성(巨姓)인 김씨 일족과 함께 안동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호상(湖上)의 오른편 거성(巨姓) 김씨일족과 해당 목사 이승우(李承宇)와 공동으로 의기를 떨쳐 홍주(洪州)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이 구절은 ‘제천(堤川)’ 아래에 올려 써야 한다- 정최재(鄭最在)는 영천(永川)에서 군사를 일으켜 진주(晉州)와 군사를 합병하였다. 광주(光州) · 안성(安城) · 죽산(竹山) · 진천(鎭川) 등의 고을이 모두 의병을 일으켰다. 양서(兩西, 해서와 관서)와 북도(北道)에도 또한 의병이 있었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 자세히 알지 못했다. 의병의 수를 크게 보면 수만 명이 넘고 적게 치더라도 7, 8천 명 이하가 아니었다. 관찰사 이하 개화(開化)를 주장한 관장(官長)으로 죽임을 당한 자가 수 십여 명이라고 한다. 10명의 대신 중 유길준(兪吉俊, 俊은 濬의 오기)은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기에 두려워서 소식을 듣고 도망갔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단발령이 우선 중지되었다.
서울에서 금영(錦營, 충청감영)의 관찰사에게 보낸 전문(電文)에 의하면, -등서하여 보여주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이를 적는다-, 12월 초6일 땅거미가 질 무렵 러시아 군병 백여 명이 밖에서 도성으로 들어왔다. 다음날 아침 임금과 세자께서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하셨다. 28일 아침 임금께서 단발령을 시행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총리대신 김홍집, 군부대신 조희연(趙羲淵), 경무사(警務使) 허진(許璡), 내부대신 유길준(兪吉準), 농상대신 정병하(鄭秉夏), 탁지부대신 어윤중(魚允中), 법부대신 장박(張博)과 그 나머지 우범선(禹範善), 권형(權瀅), 이두황(李斗璜) 등이 정사를 그릇치고 난리를 초래하여 온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 만백성은 때를 기다리지 말고 즉각 붙잡아 참수하라”라고 하였다. 즉시 순검(巡檢)을 시켜 체포하게 하니, 조희연 · 유길준 · 장박 · 어윤중 · 허진 등은 도망갔고, 김홍집과 정병하는 당일 종루(鍾樓) 앞에서 타살되었는데 김홍집은 허리가 끊어지고 정병하는 목이 잘렸다.
임금은 러시아 공관에서 총리대신 김병시(金炳始), 내부대신 박정양(朴正陽), 탁지부대신 윤용구(尹用求), 궁내부대신 이재순(李載純), 법부대신 조병직(趙秉稷),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윤용(李允用), 경무사(警務使) 안경수(安駉壽) 등 10명의 대신을 천망(薦望)하는 윤음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