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1894)
1월에 호남 고부(古阜)에서 민요(民擾)가 크게 일어났다. 해당 현감 조병갑(趙秉甲)은 탐학(貪虐)으로 조사를 받고 임금께 아뢰어 파직되었다. 본현 전봉준(全鳳俊, 鳳俊은 琫準의 오기)은 본래 동학도이고 또 민란을 일으킨 우두머리이다. 녹두장군(綠頭將軍)으로 자칭하고 난민(亂民)과 합세하였으며 호남의 여러 고을의 동비(東匪)가 모두 메아리처럼 호응하였는데, 이른바 김개남(金介男) · 손화중(孫化仲) 등 이루다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호서(湖西) 지역은 도내 동학도가 모두 최법헌을 우두머리로 삼고 곳곳마다 봉기하였는데, 그렇지 않은 고을이 없었다. 모두 왜적(倭賊)을 몰아내는 것으로 명분을 삼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화적(火賊)처럼 자행하고 협박해 빼앗고 전곡(錢穀)을 강제로 탈취하고 사적인 원한을 풀고 다른 사람의 분묘를 파헤쳤다. 또한 빚을 받는다고 하면서 남의 살림살이를 빼앗고 병장기를 약탈하고 말과 소를 탈취하였다. 그들의 행위가 모두 이와 같을 뿐이니, 말할 만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천하 만고에 천한 도적떼였는데,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는 것이 병란보다도 심하였다.
○ 3월 토포사 홍재희가 경병(京兵) 천여 명을 거느리고 전주에 가서 동학도와 접전하였다. 동학도가 흩어지고 모이는 것이 일정하지 않았기때문에 수개월 동안 항복시키지 못하였다.
○ 4월 금산군수(錦山郡守)가 동학도를 많이 죽였다.
○ 5월 20일 본주(本州)에 새로 제수된 관원 신빈(申彬)이 도임하였다. 이 때 본주 경내에 동학이 접(接)을 수십 여 곳에 설치하여 대접(大接)은 천여 명이고 소접(小接) 역시 3, 4백여 명 이하로 내려가지 않았다. 그 두령을 접주(接主)라고 칭하였다.
그들이 주장하기를, “우리 동학도에 들어온 사람은 모두 신명(神明)의 도움을 받고 병든 자는 낫고 가난한 자는 부유해지고 병란 중에도 생명을 보호할 수 있으며 나쁜 짐승이 범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현혹되어 입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입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강제로 권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온갖 형륙(刑戮)을 당하게 하여 할 수 없이 입교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 때문에 여러 고을의 동학도가 더욱 세력이 커지고 관에서 내린 명령은 행해지지 않아 이로 인하여 큰 혼란이 초래되었다.
○ 7월 초5일 이인(利仁) 반송(盤松)의 동학접(東學接)으로부터 백미(白米) 2백 섬, 말(馬) 2필, 총 3자루를 우리 집에 배정하고서 그 무리 6~7명으로 하여금 사통(私通)을 가지고 와서 재촉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국가를 위하는 의병이다. 외국이 와서 우리나라를 뒤흔들기에 장차 토평(討平)하려고 하는데, 그 물품은 군량미에 쓰려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잠시도 지체함을 용납하지 않고 행동에 의기양양한 분위기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나라를 위하는 일을 어찌 느슨하게 할 수 있는가. 응당 내일 내가 가서 그 접주(接主)를 만나 조치할 방도를 논의하겠으니 그대들은 모두 가시오”라고 하였다.
그 다음날 초6일 반송에 가서 그들 접 안으로 들어가니, 흰 포장(布帳)을 넓게 펼쳐 놓고 수백 명이 모여 있었다. 빙 둘러 주둔해 있는 모습이 이른바 장사진(長蛇陣)이었다. 병풍을 두르고 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는데, 그 위에 앉아 있는 40여 명은 이른바 대장들이었고 김필수(金弼洙)가 접주였다. 모두 좌석에서 일어나 나를 맞이하였다. 나는 저들을 한번 돌아보고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렇지만 조심하지 않으면 필시 저들에게 욕을 당할 분위기였다. 그래서 ≪웃음을 참고≫ 접주와 안부인사를 나눈 뒤 말하기를, “원컨대 의병을 일으킨 뜻을 알기를 원하오”라고 하니, 그가 말하기를, “지금 외국이 침략해 와서 종묘사직이 매우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기에 군사를 일으켜 한번 토벌함으로써 환란을 진정시키고자 하오. 그 때문에 어제 사통을 보내 군수품을 보충하려는 계책을 한 것이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의리가 그와 같다면 누가 공경히 따르지 않겠소. 내 비록 가난하여 그릇에 담을 곡식조차 없을지라도 어찌 심력을 다하여 돕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형편이 좋지 않으면 억지로 할 수가 없소. 1백석을 감해서 다만 1백석만 수송함이 좋겠소”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내 어찌 가난을 핑계로 요구조건을 감하기를 원할 수 있겠소. 수를 더한다면 괜찮지만 수를 감한 것은 원치 않소이다. 쌀과 말과 총은 모두 현재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근심이 없소이다. 군대를 써서 적을 토벌하는 것은 계획에 달려있는 것이오. 그 계획을 잃게 된다면 비록 10년 치의 쌀과 만개의 노궁(弩弓)의 강대함이 있더라도 아무런 보탬이 없을 것이오. 지금 나에게서 요구한 쌀은 10일치의 양식에 불과하고 말은 두 사람이 타는 정도에 불과하고 총은 세 명에게 주는 것에 불과하니, 어찌 충분하리오. 군사는 신속함이 중요하니 우물쭈물해서는 불가하오. 지금 귀진(貴陣)이 사기(事機)가 급하지 않소. 진퇴(進退)와 존멸(存滅)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계책이 어디에서 나온단 말이오. 참으로 나아가도 근심되고 물러나도 근심된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오. 내가 비록 어리석으나 망령된 일을 함부로 하지 않으니, 나아가도 말할 만한 것이 있고 물러나도 말할 만한 것이 있을 것이오. 말할 만한 것은 배정한 물건보다 더 나으니 제공(諸公)은 잘 살피시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저들은 모두 말할 만한 것은 묻지 않고 나에게 배정된 물건을 면제해 주면서, 편안히 돌아가라고 청하였다.
이는 왜국을 배척한다는 명분이 본래 가탁한 것이기에 물어 볼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말할 만한 실지가 없이 다만 풍자법을 써서 그 허실을 보고자 했을 뿐이었기 때문에 드디어 돌아왔다.
아들 긍석(肯石)이 당시 금영(錦營, 충청감영)의 관아에 머물러 있다가, 내가 반송에 갔다는 소식을 듣고 금영에서 곧바로 돌아가서 이인(利仁) 대접주(大接主) 임기준(任基準)을 만나 말을 하였다. 그래서 더 이상 다시는 침책을 당하거나 욕을 당한 일이 없었다. 나와 같이 가난한 사람도 이러한 침책을 당하였으니, 재산이 풍족한 사람으로서 강제로 약탈을 당한 것은 이루다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각 곳의 동학도의 일이 모두 이와 같으니, 토벌하여 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8월 동학도 괴수 서병학(徐丙學)이 보은에 주둔할 때 경병(京兵)에게 체포되어 한양으로 보내졌다. 조정에서는 ≪서병학을≫ 도사(都事)로 차출하여 금영(錦營, 충청감영)에 내려 보내어 동학도를 금지시켰는데,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공격하는 의도였다. 그런데 이인의 접주 임기준과 따지다가 도리어 소란을 일으켰다.
○ 9월 본관은 체임하고 새로 제수된 수령 박현량(朴顯亮)이 부임하였다. 8월-응당 9월달 위에 적어야 함- 옛 금백(錦伯, 충청도관찰사) 이헌용(李憲容)씨와 새로 제수된 박제순(朴悌淳)씨가 본부(本府) 동헌(東軒)에서 교귀(交龜, 부신(符信)을 넘겨주고 받고 하던 일)하였다. 금백의 교귀례는 천안군(天安郡)에서 행하는데, 동학의 소란때문에 본주에서 행하였다.
○ 10월 23일 동학도 1만여 명이 갑자기 본촌(本村) 신소(莘沼)에 들어와 유숙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저녁밥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동학도가 도살한 소가 12마리였다. 이는 모두 동학도가 여기 들어올때 중도에서 탈취한 소였다. 마을사람들이 형편에 따라 공급하였는데 24일 아침밥까지 통털어 계산하면 2만 상(床)이 되었다. 온 촌락이 탕진되어 크게 재앙이 낀 운수를 당하였다. 오직 사람 목숨이 상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본촌 신소에 마을이 생긴 지 몇 백년 만에 처음으로 이러한 좋지 않은 운수를 만났다. 이후로부터 혹 1, 2백 명 혹은 2, 3십 명이 떠돌다가 먹을 것을 요구한 것이 또한 몇 번인 줄 알 수가 없다. 두려워 동요하는 마을 사람들을 내가 그때마다 안정시키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비록 위태로운 상황이지만 또한 훗날 편안하고 좋은 운수가 있을 것이니, 행여 놀라서 동요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들이 겁탈하고 탈취하는 폐해를 말로 표현할 수 없으니, 그 실은 화적(火賊)이었다.
○ 10월 24일 동학도가 상신(上莘)에서 출발하여 구치(鳩峙)를 넘었는데, 물고기를 꿴 것과 같이 행군하여 몇 리(里)까지 길게 연이어 있었다. 사방의 동학도가 모이니 대체로 10여만 명이었다. 효포(孝浦), 태봉(胎峯), 오곡(梧谷), 이인(利仁) 등지에 나누어 주둔하였다. 일본군 및 관군과 교전하였다. 동학도는 모두 산 위에 주둔하고서 밤에는 마을의 민가에서 이불을 훔쳐다가 몸을 둘러싸고 밤을 보내고, 낮에는 마을사람을 위협하여 밥과 음식을 가져오도록 하였다. 종일토록 접전하여 총소리의 메아리가 멀리서는 콩을 볶는 소리처럼 들리고 가까이에서는 우레가 진동하는 소리처럼 들리며 밤낮으로 끊이질 않았다.
○11월 11일 전주 김봉준(金鳳俊, 전봉준의 오기)은 크게 격파를 당하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노성(魯城)으로 달아났다. 죽은 자가 태반이었다. 그 외의 동학도 역시 모두 패주하였는데, 수시로 모였다가 흩어졌다.
○ 이때 양호(兩湖)에는 동학도가 일어나지 않는 고을이 없어 곳곳마다 소요스러웠다. 17일 전주 김개남(金介男) · 서일청(徐一海) · 손화중(孫化仲) 등이 수천 명을 거느리고 왔다가 청주 남석교(南石橋)에서 패배하여 물러갔다. 진잠(鎭岑)에 가서 또 패배를 당하였는데 죽은 사람이 무수하였다.
○ 봄 이후 대전(大田)의 유성(儒城) 파군리(破軍里) 온전(溫田)의 동학도가 청주의 관군과 대전에서 교전하였다. 관군은 공격하기 위한 군대가 아니고 동학도의 동정을 살피기 위한 군대였기 때문에 73명에 불과하였는데 모두 멸사하고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청주 병영(淸州兵營)에서 관군을 거느리고 와서 대전 파군리를 공격해 도륙하였다.
○ 18일 전주의 전봉준과 김개남이 관군에게 사로잡혀 포박된 채 서울로 보내졌다. 공주(公州) 임기준(任基準) 역시 붙잡혀 서울로 갔는데, 임기준은 감옥에 갇히고 김개남과 전봉준은 모두 형륙(刑戮)되었다.
○ 새로 제수된 완백(完伯, 전라도관찰사) 이덕재(李德載)씨가 군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본주에 와서 며칠 머물다가 출발하여 전주에 도착하였는데 동학도에게 저지를 당하여 감영에 들어가지 못하다가 오랜 뒤에 감영에 들어갔다.
○ 12월 동학도는 모두 보은, 죽산(竹山), 안성(安城) 등지로 도망갔다. 죽은 자가 몇 천명인지 모르지만 다 죽음을 당하였다. 공주, 청주, 홍주, 서산 등에서도 전후로 붙잡히거나 사살된 자 역시 몇 천명인줄 모른다.
○ 이 해 봄에 다음과 같은 참서(讖書) 한 구절이 세상에 떠돌아 다녔다. ‘서리가 내려 초목이 진 후에 온 땅에 창이의 머리가 가득하네(霜落草木後 滿地蒼耳頭)’라고 하니, 이를 풀이하는 자가 “의서(醫書) 중에 창이(蒼耳)는 일명 도인두(道人頭)이다. 지금 동학도가 자칭 도인(道人)이라고 하는데, 만일 도인이라고 칭하지 않으면 번번이 저들의 노여움을 당한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그 무리를 두려워하는 자는 반드시 도인이라고 일컫는다. 이는 동학도가 많이 죽을 조짐이 아니겠는가. 지금 이를 보면 이 참서를 만든 사람은 지각(知覺)이 있는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 팔도에 모두 동학도가 있었는데, 그 중 양호(兩湖)가 더욱 심하였다. 토벌한 후에 각처의 동학접은 도망갔다가 모두 붙잡혔다. 강제로 동학에 입교한 자를 막론하고 체포하라는 정부의 관문(關文)에 따라, 병대(兵隊)를 풀어 수색해 붙잡게 하였다. 그러나 병대를 마구 풀어 놓아 폐단이 낭자하여 횡액을 당한 원한이 많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체포령을 다시 중지하였다. 이 때문에 요행히 벌을 받지 않고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접주(接主)가 많았다고 한다.
이 해에 발생한 일이지만 날짜를 정확히 모르는 것은 들은 대로 아래에 기록하였다.
일본 군사들이 궐내로 난입하여 옛날부터 전수되어 온 보화(寶貨) 및 일상용품 등을 연일 찾아내 가져간 것이 수백 수레가 되었다고 한다. -추후에 들으니 6월 21일부터 시작하였다고 한다-
청나라 장수 통령(統領) 섭사성(聶士成)이 일본군사와 소사(素沙)에서 교전을 하다가 패배하여 달아났다. 본주를 지나가는 청나라 군사가 수백 명이었는데, 일본 군사들이 추격하여 공격할까 두려워 모두 몸을 숨기고 금강진(錦江津) 남산(南山) 송추(松楸) 안에서 머물렀다. 그들의 굶주림과 곤란한 지경을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라고 하였다.
전 영백(嶺伯, 경상도관찰사)인 판서 이용직(李容直)씨와 전 금백(錦伯, 충청도관찰사)인 판서 조병식(趙秉式)씨가 모두 뇌물죄로 붙잡혀 갔다. 전 고부현감 조병갑(趙秉甲)은 임금께 아뢰어 파직된 후에 사양동(沙陽洞) 본가에 있었다. 조병갑 역시 뇌물죄로 붙잡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