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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갑신년(1884)

10월에 박영효(朴泳孝), 김옥균(金玉均), 서광범(徐光範), 서재필(徐載弼), 홍영식(洪英植) 5흉(五凶)이 생도(生徒)-재상가의 서자제(庶子弟) 중 왜별기(倭別技)를 배우는 자를 생도라고 하였다- 및 왜병(倭兵)과 함께 궁궐을 침범하여 임금이 계신 대전으로 올라가서, 임금으로 하여금 왜진(倭陣)으로 거처를 옮기도록 강제로 권하는 등 온갖 능욕을 일삼았다. 결국 임금이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궁궐을 도보로 나왔다. 홍영식이 몹시 능멸하는 말을 하여 기강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러자 무감(武監) 중 어가를 수행하던 자가 분한 마음으로 어가 앞에서 그를 타살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대궐 밖에 있다가 위급한 소식을 듣고 대궐에 나아갔지만, 일본군병의 제지를 당하여 들어갈 수가 없었다. 판서 조영하(趙寧夏)씨는 기어코 밀치고 들어가려다 일본 군병의 칼에 왼손이 잘렸다. 조공이 땅에서 잘린 손을 주워들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준엄하게 꾸짖었는데, 이로 인하여 살해를 당하였다. 판서 심상훈(沈相勳)씨 역시 제지를 당하였는데, 해(害)가 장차 몸에 미치려고 하자 둘러내는 말로 죽음을 면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는 즉시 청나라 군진에 가서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원장군(元將軍, 원세개)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궐로 진입하였지만, 임금이 어디에 있는지를 몰랐다. 검무(劍舞)를 추듯이 날아 수십 장(丈)의 북청문(北淸門)을 넘어가서 바삐 사방으로 임금을 찾았다. 막하에 있는 여러 장수들이 문을 넘어왔고 시종 역시 수십 명이 있었다. 다행히 위급한 상황에서 임금을 만나자 포위를 풀고 본궁으로 모시고 돌아왔다. 비록 창졸간의 변란이라 하더라도 존엄하신 임금을 범하고 지척 간에 존망의 위급한 상황은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최초의 변고였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보다도 심하였다. 만약 원세개 장군의 재조(再造)의 공로가 없었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4명의 흉적은 모두 왜국으로 도망갔고 생도는 혹 죽거나 도망가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주석
홍영식(洪英植) 원문에는 홍영식의 이름이 결락되어 있으나, 보충하여 번역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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