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해년(1875)
병자년 이후 왜국으로 가는 통신사(通信使)가 계속 이어졌는데, 김홍집과 어윤중이 누차 사행(使行)하고서 양국(兩國)의 통상 강화를 자신의 공(功)으로 삼았다. 이로 말미암아 왜관(倭官)인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먼저 와서 대궐을 출입하여 공경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하였다. 구로다기요타카(黑田靑龍, 靑龍은 淸隆의 오기), 미야방고히(宮番小日), 미쯔방레쵸우(屈番禮兆), 미요시료우데라(三善亮寺) 등이 연이어 계속 와서 그대로 경성에 머무르니, 그 기세가 매우 성대하였다. 왜인(倭人) 상인(商人) 역시 통화(通貨)를 가지고 와서 경성에서 장사를 하였다. 그들은 후한 가격으로 건물을 매입하거나 혹 집을 새로 지어 극도로 화려하게 치장하였다. 또 인천과 부천 사이에 개항한 후 그 가족을 데리고 거주한 수가 천백 여명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팔던 상품은 모두 경박하고 기괴하거나 쉽게 부서지는 물건으로 단지 눈요기에만 만족시키는 물건이었다. 본국의 경향 각지의 상업권리가 모두 그들에게 돌아갔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