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문기(時聞記)
우리 동방에서 문명(文明)의 정치를 해온지 이제 504년이 되었다. 그런데 교화(敎化)가 점차 쇠락해지고 ≪국가의≫기강은 더욱 무너졌다. 임술년(1862) 민요(民擾)가 난리의 시작이었다. 내란이 일어나자 외국이 침범하였고, 적신(賊臣)이 일어나자 민심이 놀랐으며, 국사(國事)가 급박해지자 온갖 변고가 마구 일어났으니 백성이 도탄(塗炭)에 빠진 것이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나처럼 아흔 살이 된 어리석은 백성도 여러 세대에 걸쳐 교화를 받은 사람이다. 비록 산간벽지에 살고 있지만 통곡하고 싶은 심정은 한(漢) 나라 가생(賈生, 賈誼)의 마음보다 심하다. 솥에도 귀가 있기에 자연히 듣게 되는 것과 같이 여항(閭巷)에 와전된 말이라도 우선 기록하여 그 허실을 징험하고자 한다.
병신년(1896) 가을 7월 상순에 비로산 노맹(毗盧山老氓) 이단석(李丹石)이 수석산방(壽石山房)에서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