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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진사 정성우의 상소 [進士 鄭惺愚 疏]

삼가 아뢰옵니다.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은 우주의 기둥이고 백성의 주춧돌이 되는데, 사람이 되어 이것이 없으면 의관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짐승에 불과하며, 나라에는 이것이 없으면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여도 귀신과 여우에 불과합니다. 대체로 무릇 천하국가의 신하된 사람이 진실로 사람의 마음이 있고 나라를 향한 정성이 있다면, 어찌 짐승과 귀신과 여우가 되는 지경에 이를 수가 있겠습니까?

아! 이른바 개화(開化)의 무리들이 외국에서 활동하다가 곧 본국으로 돌아와서 모양을 바꾸어 이상한 차림새를 하고 다른 나라의 말을 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면서, 겉으로는 나라를 부강하게 하겠다는 말을 핑계로 삼고, 속으로는 윤리를 모르는 마음을 품고효경(梟獍), 뱀처럼 서리고 지렁이처럼 얽혀서 외국인을 선동하고 얽어매어 만고에도 없을 변란[갑신정변]을 일으켰으니, 옛날과 지금의 역사에 어찌 이러한 역적이 있었으며, 천하만국에 어찌 이러한 변란이 있었겠습니까?

지금 역적의 무리가 혹은 도망가서 아직 붙잡지 못하였고, 혹은 죽어서 형을 집행하지 못하였으며, 혹은 살아 있어도 아직 죽이지를 못하였고, 혹은 벼슬을 하면서 정치를 어지럽히고 있으니, 오직 우리 열성조께서 수백 년 동안 이룩한 법도가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난신역도에 의해 중지되고 없어지게 되었단 말입니까? 이 역적은 단지 폐하의 역적만이 아니라 바로 선왕들의 역적도 되는데,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살려주는 것을 좋아하는 덕만을 가지고 지금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십니까?

아! 애통합니다. 갑신년(甲午, 1884년) 10월에 법망을 피해 도망한 역적의 무리가 해외로 자취를 숨겼다가 곧 갑오년 6월의 난을 일으켰고, 을미년(乙未, 1895년) 8월의 큰 역적이 되었습니다. 이를 살펴보건대 앞뒤에 걸쳐 반역을 도모한 사람들을 모두 소탕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화근이 될 것이 틀림없으니, 어찌 진정으로 애통하고 절박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흉도 서재필(徐載弼)은 만고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짓고도 방자하게 본국으로 돌아와서, 어떻게 감히 같은 하늘 아래에 살면서 나라의 권세를 손에 쥐고 마음대로 희롱한다는 말입니까? 또 하물며 스스로 폐하의 앞에서 외국의 신하라고 말하였으니, 그가 만약 외신(外臣)이라면 어찌 조선국의 일에 관여한다는 말입니까? 저 이른바 독립신문(獨立新聞)이라는 것은 비방하는 것에 불과할 뿐 도무지 의리가 없으니, 이는 나라를 위한 것도 아니며 또한 백성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선왕의 법제를 고쳐서 오로지 본국을 망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흉악한 역적을 어떻게 하늘과 땅 사이에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갑오년 6월의 간악한 무리 김가진(金嘉鎭)·안경수(安駉壽) 등은 맨 먼저 주창하여 나라를 병들게 하였는데, 나라에는 이와 같은 병폐를 제거할 사람이 없고, 박정양(朴定陽)·조병직(趙秉稷) 등은 탐관오리로서 의로움이 없었고, 의로움이 사라져 난을 일으켰으며, 이윤용(李允用)은 만 가지 죄를 모두 갖추고, 온 집안이 모두 탐관오리였습니다. 이러한 간악한 무리는 권리가 있는 직책을 장악하고, 국외(局外)의 동정과 궁궐 안에서 조종하는 것을 살피지 않은 것이 없어 바로 그날의 흉악한 재앙이 있게 하였으니, 행동거지를 따져 보면 용서하기가 어려운 자가 죄를 저지른 것이 이들입니다.

김윤식(金允植)·어윤중(魚允中) 등은 반역을 꾀한 우두머리로 이미 외국의 공보(公報)에 나왔으니, 본국의 의리가 있음에도 어찌하여 성토하지 않는 것입니까? 을미년 8월의 대역죄인 김홍집(金弘集)·유길준(兪吉濬)·정병하(鄭秉夏)·조희연(趙羲淵)·권형진(權瀅鎭)·이두황(李斗璜)·우범선(禹範善)·이범래(李範來)·이진호(李軫鎬) 등은 먼저는 간악한 무리가 되었고, 후에는 역적의 무리가 되었는데, 음모와 흉한 계책이 왕망(王莽)이나 동탁(董卓)보다 더 심하였으며, 이괄(李适)이나 신치운(申致雲)보다 심하였습니다.

김윤식·어윤중으로 말하자면 죄를 성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시원스럽게 결단하십시오. 흉도 서재필은 그대로 둘 수 없는 자입니다. 지금 만약 머뭇거려 그대로 둔다면 훗날 다시 갑신년과 같은 일을 도모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찌 알겠습니까? 죄를 면하여 내려준 은전을 다시 거두어서 빨리 나라의 법도를 바로잡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갑오년의 간악한 무리에게도 또한 나라의 법을 시행하는 것이 옳습니다. 을미년의 대역죄인 중에서 죽은 사람은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형벌을 내리는 것이 옳고, 도망간 사람은 잡아서 사형을 시키는 것이 옳으며,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빨리 나라의 법을 시행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은 다만 그 자신만을 죽여서는 아니 되고, 모두 연좌의 법률을 적용하여 국가에서 호랑이를 키운 후환을 막아, 신하와 백성의 뼈에 사무친 원통함을 씻어 주십시오. 이와 같이 제거하고 다스린 후에야 재앙과 난리의 싹이 감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 폐하께서는 누구를 꺼려하여 오래도록 이 일을 시행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지금 난을 바로잡고 태평하게 다스리고자 한다면, 김홍집과 유길준이 천거한 여러 관리는 바로 대역 죄인이 천거한 자들로, 내외의 관직에 그대로 두어서는 아니 되니, 즉시 대관 이하로부터 모두 제거하여 조정의 기강을 엄숙하고 맑게 하십시오. 그리고 흉도가 정한 신식 관제와 품계 등의 여러 건의 문자(文字)에서 갑오년 6월 21일 이후의 것은 모두 시행하지 마시고, 빨리 선조(先朝) 때의 옛 제도를 회복시키며 빨리 여러 군과 지방에 장병을 두어서 팔도의 소요를 평정하시고, 안팎의 병권(兵權)을 전하께서 총괄하여 살피옵소서.

무릇 제왕의 어좌(御座)는 비유하자면 북극성이 그 곳에 있는 것과 같아 잠시도 다른 곳으로 어가를 옮길 수가 없으니[播遷], 즉시 궁궐로 돌아오셔서 안팎의 여러 신하와 백성들의 간절한 소원을 펼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빨리 국장(國葬)을 시행하여 왕태자 전하의 효성을 펴도록 하십시오.

또한 태학(太學)인 성균관은 어진 이를 육성하고 착한 것을 닦는 장소이며, 500년 동안 제사를 지내던 자리인데, 하루아침에 기예를 닦는 장소가 되었으니 성현을 높이는 도리가 이로부터 없어질 것이며, 유학을 숭상하는 기풍이 이로부터 사라질 것입니다. 이러한 폐단을 그대로 두고 고치지 않는다면, 앞서 성왕(聖王)이 남긴 교훈이 지금에 이르러 어디에 있겠습니까?

대개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오직 사람을 얻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조정을 바로잡고 만민을 바로잡으려고 한다면 어찌 그만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원임(原任) 대신 이하부터 문무관리(文武官吏)와 사대부와 평민에 이르기까지 특별히 가려서 거두어 등용하시되, 조정에 줄지어 세워 좌우를 보필하게 하시고, 각 삼군(三軍)의 일을 맡겨 안으로 닦고 밖으로 방어하게 하시며, 날마다 함께 나라의 일을 논해 명확하게 하여 위로는 종사를 편안하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주석
효경(梟獍) 효(梟)는 어미를 잡아먹는 새이고, 경(獍)은 아비를 잡아먹는 짐승인데, 흉악하여 윤기(倫紀)를 모르는 사람을 비유한 것이다.
[갑신정변]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을 말한다. 당시 김옥균 등 개화파들이 일본공사관을 끼고 정변을 단행했으나 3일 만에 실패하였다.
갑오년 6월의 난 일본군이 경복궁 강점을 단행하여 고종을 유폐하고 갑오개화정권을 출범시킨 사건을 말한다.
을미년(乙未, 1895년) 8월의 큰 역적 일본 낭인들이 주축이 되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을 말하며, 이 사건에 일부 친일파들이 협조하였다.
외신(外臣) 서재필은 갑신정변 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미국 국적을 취득하고 귀국하였다. 그는 고종을 배알할 때에 미국 시민이라고 하여 자신을 외교관들이 사용하는 용어인 외신이라고 불렀다고 하여 비난을 샀다.
왕망(王莽) 전한(前漢) 말의 권신(權臣)으로서 임금을 죽이고 나라까지 빼앗아서 황제(皇帝)라고 일컬었으며, 신(新)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신치운(申致雲) 자는 공망(公望), 호(號)는 삼지당(三之堂)이고,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권상하(權尙夏) 등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흥해(興海)에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다.
[播遷] 고종은 명성황후 시해를 겪고 나서 러시아 접근정책을 쓰면서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播遷)하였다가 다시 경운궁으로 옮겼다.
국장(國葬) 고종은 명성황후의 시신을 경운궁에 두고 빈전도감을 설치하고도 국장을 치르지 않았다.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대내외에 알리려는 의지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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