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초 2일 서울에서 전해 온 기별 [五月 初二日 京奇]
호남의 소요는 날마다 더욱 창궐하고 있습니다. 초토사 홍계훈의 처음 이름은 재희(在羲)인데, 행군한 지가 이미 1개월이 넘었어도 아직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지난 27일 동적(東賊)이 전주성(全州城)에 갑자기 뛰어 들어와 총을 쏘고 불을 지르자 전 감사 김문현(金文鉉)은 미복을 입고 황급히 공주로 피하였고, 전주 관아에서 받들던 조경묘(肇慶廟)와 경기전(慶基殿)의 위판과 영정은 전주부의 30리 거리에 있는 위봉산성(威鳳山城)으로 옮겼습니다. 28일에 초토사가 이끄는 군대가 추격해 와서 전주부 아래에서 전투를 펼쳐 저들 무리 중에 갑옷과 투구를 쓰고 총을 쏘는 자 30여 명을 죽였고, 또한 목을 벤 것이 수백 명이었으며, 이후 저들 무리는 성책을 견고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그 뒤의 소식은 잠시 듣지 못하였는데 선전관(宣傳官) 및 하인 2명과 임금의 말씀을 알리는 초토사의 종사관 2명이 피해를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새로 부임한 감사 김학진(金鶴鎭)은 그믐날 여산(礪山)에 도착하였고, 순변사(巡邊使) 이원회(李元會)는 서영(西營)의 군사 5초(哨)를 거느리고 그저께 출발하였습니다. 염찰사(廉察使) 엄세영(嚴世永)은 28일에 출발하여 옛 전주감사에게 병부(兵符)나 인신(印信)을 넘겨받기도 전에 멋대로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 그가 성을 지키지 못한 일로 임금의 전교에 따라 잡아오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런데 대간(臺諫)의 계문(啓聞)이 쏟아져 청국에 구원을 요청하여서 청나라의 군선이 며칠 후에 인천에 도착하여 정박(碇泊)한다고 하였습니다.
옛 방백은 혼자 충청감영으로 도주하였고, 전주부의 판관은 정령을 어질고 착하게 한 탓으로 하여 의리로 보아주어 욕을 당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탐지하여 보고하는 군사를 죽이고 전기선을 끊고 진산(珍山)과 금산(錦山)으로 향한다고 하여, 그곳에 거주하던 백성이 황급하게 흩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