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9일 탐지하여 30일 보고함 [二十九日探知 三十日發報]
인시 [寅時]
상주(尙州)와 선산(善山) 사람 100여 명과 태안(泰安) 사람 수십 명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전과 같이 진을 설치한 후에 진중 안에 있는 아이와 노약자를 모두 내보내어 여러 곳의 집에 분산시켰고, 깃발은 모두 제거하고서 왜와 서양을 배척한다는 글귀의 깃발만 세워 놓았지만, 달아맨 등불만 간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제 들어온 수원접의 사람들은 장재들에서 장내리로 이동하였다고 합니다.
오시(午時, 오전 11∼오후 1시) 쯤에 광주(廣州) 사람 수 백 명이 돈[錢] 네 바리를 실어 왔고, 또한 혹은 천안(天安)이라고도 하고, 혹은 직산(稷山)과 덕산(德山)이라고도 하는 사람들이 각각 돈을 수 십 냥씩을 지거나 메고 장내리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길가에는 쌀을 사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3월 30일 유시(酉時, 오후 5∼7시)에 보은군 장내리에 모여 있는 동학인들을 정탐하였고, 여러 지역에서 장색(將色, 파수를 보는 담당군교)들이 은밀하게 알려온 것을 모아 기록하여 보고합니다.
하나, 장내리를 정탐한 아전이 보고한 내용에는 “30일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비가 많이 내려 하천과 도랑이 넘쳤는데, 저들은 처음에는 진을 치지 못하고 집에 흩어져 머물면서 다만 경(經)을 암송하고, 혹은 두세 사람 혹은 서너 사람씩 밖으로 나갔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모두 기록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 적암(赤巖)에서 지키는 집강(執綱)과 장색(將色)이 보고한 내용에는 “상주 강화일(姜化一)의 접 6명, 충청도·경상도의 접 3명, 공성(公城)의 김맹현(金孟鉉) 등 7명, 김산(金山)의 김상수(金尙水)·최봉비(崔鳳飛) 등이 차례대로 물러갔는데, 뜻밖에 안동접(安東接) 소속 40여 명이 흩어지던 사람들을 이끌고 와서 큰 소리로 말하기를 “물러가라는 전령은 내가 모르는 일이다”라고 하면서, “장색을 때려 상처를 입혔는데도 막기가 어려웠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 9시에 장색이 보고한 내용에는 “성주(星州)·선산·김산·상주 등지의 사람 36명 정도가 나갔고, 장수(長水)의 황병원(黃丙元) 등 130여 명과 영암(靈巖)·무안(務安)·순천(順天)·인동(仁同)·지례(知禮) 등지의 사람 260여 명이 깃발 세 개를 세웠는데, 한 곳에는 ‘호수부의(湖水赴義)’ 라고 글을 쓰고, 한 곳에는 ‘호장대의(湖長大義)’ 라고 쓰고, 다른 한 곳에는 ‘호남수의(湖南水義)’ 라고 써서 차례대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을 타이르고 설득하자 저들은 도어사가 발급한 통행 증서를 내보이며 말하기를 “우리들은 이러한 이유를 알고 와서 기다리고 있으므로 임금의 비답이 내려오면 되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 병원(幷院)의 장색이 보고한 내용에는 “공주(公州)·옥천(沃川)·문의(文義) 등지 사람이 해산한 것이 15명이 되고, 새로 들어오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 원암(元巖)의 장색이 보고한 내용에는 “들어온 사람들이 있는 곳마다 가서 하나 하나 만나 타이르고 설득하니 답하기를, “우리가 몇 백 리를 멀다고 생각하지 않고 왔는데, 어찌 허망하게 곧바로 되돌아가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조금도 거리낌 없이 밀고 들어와서 장색과 동민(洞民)의 힘으로는 막기 어려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