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7일 탐지하여 즉시 보고함 [二十七日探知 卽發報]
즉시 도어사의 지시를 받아 아전을 보내어 타이르고 설득하면서 묻기를 “이미 명령을 받들어 해산한다고 알려 놓고 어찌하여 물러가지 않으며, 어찌하여 깃발을 뽑아버리지 않고 여전히 그대로 두는가?”하였더니, 대답하기를 “깃발은 마땅히 없애야 하겠지만 그 수가 많고 각 접들이 비록 해산하여 돌아가더라도 표준을 세워 식별할 수 없으니, 마땅히 다시 등호(燈號)를 만든 후에 깃발의 번호를 제거하겠습니다. 오늘 우선 나머지 무리 중에서 늙고 어린 사람부터 돌아가도록 하였음에도 각 고을에서 군사를 보내 가는 것을 막는 폐단이 있어 다시 돌아와 모여들고 있으니, 장차 임금의 회답을 기다려 모두 함께 돌아가겠다”라고 하였습니다.
3월 26일 술시(戌時, 오후 7∼9시) 쯤에 수원(水原)·용인(龍仁) 등의 지역에서 300여 명이 추후에 도착하였고, 27일 아침에는 호남의 영광(靈光) 등의 지역에서 100여 명이 또한 도착하였는데, 전에 비해 그 수가 더해졌지 줄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