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인이 내린 명령 [東學人令]
1893년 3월 16일 [癸巳 三月十六日]
지금 이렇듯 왜와 서양을 배척하는 의리는 충성과 의기가 있는 선비와 백성[士民]이라면 누가 감히 옳지 않다고 하겠는가? 비록 충성과 의리는 같더라도 도인(道人)과 속인(俗人)은 아주 달라 뒤섞여 함께 앉아 있을 수 없으니, 각각 좌석을 나누어서 활발하게 거사할 것을 의논해야 하며, 그밖에 우매하고 지각없이 다만 농사일을 하는 사람은 농업에 힘쓰는 것이 옳다. 오로지 놀면서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다가 갑자기 큰일을 포기하겠는가? 이와 같이 삼갈 것을 명령한 이후에도 한결같이 따르지 않는 사람은 마땅히 군율로 다스리고, 게시한 글을 명확히 살펴 시행하는 것을 위반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통문을 보내는 것은 무릇 사람의 도(道)가 중(中)에 위치하여 천시(天時)를 받들고 땅의 이치에 순응함으로써 위를 섬기고 아래를 기르라는 것이다. 자식 된 사람은 힘을 다해 어버이를 섬기고, 신하가 된 사람은 절개를 세워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야말로 인륜(人倫)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다.
무릇 우리 동방(東方)은 비록 바닷가 한쪽에 치우쳐 있지만 천하의 동쪽인지라, 단군이 나라를 세운 때부터 기자(箕子)가 제후에 봉해질 때까지 천시(天時)의 정함과 인륜의 순서가 스스로 바꾸지 못할 규범이 있었다. 성스러운 임금과 현명한 신하들이 사이사이 이어져 나와 전장(典章)·법도(法道)·예악(禮樂)·교화(敎化)가 빛나고 밝음이 천하에 알려지게 된 것은 인륜이 가장 밝게 더욱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중년 이래 천하가 크게 어지럽게 되어 기강이 무너져 해이해 지고, 법이 문란해져 오랑캐들이 중국을 침범하여 능욕하며, 우리 동방까지 침범하여 두루 멋대로 횡행하여도 그것을 태연하게 듣고 항상 있는 일인 것처럼 여겨 그 끝이 국가에 미칠 것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성인(聖人)이 이를 걱정하여 큰 도리를 가르침에 우리 도인(道人)이 한 마음으로 지킨 것이 여러 해가 되었다.
충과 효를 행할 곳에 뜻을 세워 죽기로 맹세한 것이 변하지 않고, 가정을 정돈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마음으로 책무에 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하물며 왜적은 해와 달을 함께 할 수 없고 하늘과 땅을 함께 할 수 없는 원수인데, 짐승과 같은 무리에게 심한 모욕을 당하고 있으니 또한 차마 무슨 말을 하겠는가? 바야흐로 지금 나라의 형편은 거꾸로 매달린 것과 같은 위급한 상황인데 아직도 그 해법을 모르고 있으니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비록 시골에 있는 백성이지만 선왕의 녹봉을 물려받아 선조들을 보전하고, 임금의 토지를 경작하여 부모를 봉양하고 있으니 신하와 백성이 구분되어 직업은 비록 다르지만 의리는 한 가지이다. 어찌 뜻을 같이하여 죽음을 맹세하는 의리가 없을 수 있겠는가? 지금 하늘[皇天]이 진실로 더러운 기운을 싫어하여 끝없는 조화를 부리시니, 참으로 뜻이 있는 선비와 사나이들이 절개를 세우고 의리를 세울 때이다.
조생(祖生)이 노를 두드리고 범공(范公)이 말의 고삐를 잡던 일에는 장엄한 뜻이 있었고, 문산(文山)이 하늘을 떠받치고 육부(陸夫)가 해를 받드는 것은 풍치와 품격이 이미 뛰어난 것이며, 양공(襄公)의 원한과 연(燕)나라 소왕(昭王)의 수치심을 보복하는 것은 한정(限定)이 있으니, 때가 왔네[時乎時乎]! 때가 왔어[時哉時哉]! 지금 우리 성상께서는 순수한 덕과 인자한 너그러움으로 모든 사무를 살펴보시는데, 안으로는 현명하고 어질게 보좌하는 신하가 없고, 밖으로는 뛰어나고 용감한 장수가 없어, 밖으로 적들이 틈을 타서 기회를 엿보며 아침저녁으로 위협하고 있다.
삼가 원하건대 여러 도인과 선비들은 한 마음으로 뜻을 같이하여 요망한 기운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종묘사직을 극복하여 다시 빛나는 해와 달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어찌 선비와 군자들이 충성을 하고 효도를 하는 도리가 아니겠는가? 어질다[仁]는 것은 낳아서 기르는 봄날과 같고, 의롭다[義]는 것은 거두어서 저장하는 가을과 같다. 지혜롭고 어진 것[智仁]이 비록 좋은 덕이기는 하지만 용기가 아니면 도달할 수 없으니, 삼가 원하건대 여러 군자들은 본연의 의리와 기개에 힘써 이 나라에 큰 충성과 큰 공적을 세운다면 매우 다행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