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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정보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장흥부사 이용태 흥학애사비 (장흥군 장흥읍 교촌남외길)
  • 지 역
  • 전남
  • 주 소
  •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교촌리 4
  • 문화재
  • 분 류
  • 정 의
관련 역사적 사실
장흥부사 박헌양(朴憲陽)은 1894년 7월 말 기실(記室) 박영수 1명만 거느리고 수레를 타고 임지에 도착하였다. 이때 장흥부에서도 농민군이 자라번지 등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육유재유고」에는 당시 농민군의 수가 수천명에 이르렀고, 장흥 주민들이 “단지 호응할 뿐만 아니라 근본을 망각하고 패륜을 저지르며 풍속을 어지럽히기에 이르러서 온 경내가 크게 어수선해졌다.”고 하였다. 박헌양은 부임한 다음날 아침에 바로 향교에 나가 향을 올려 예를 마치고, 유림들에게 “지금 인민이 어리석게 빠져있고 이류(異類)가 창궐할 때에 정학(正學)을 밝히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하고 각 면에서 큰 덕이 있는 사람을 골라 훈장(訓長)에 임명하고 날마다 강의를 받게 하고 창고 곡식을 내어 식량을 지급하고 무비(武備)를 수련하여 적을 막을 계획을 세웠다. 장흥 수성군을 조직할 계획이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한편 1894년 12월 일본군 중대장 스즈키 야스타미(鈴木安民)가 이끄는 일본군 1중대(일본군 220명, 조선인 인부 150명)는 12월 4일 부산을 출발하여 12월 6일 진해, 12월 9일 하동, 12월 12일 순천, 12월 15일 보성에 도착하였다. 스즈키는 12월 24일 오후 4시경에 대략 2개 소대 규모의 부대를 인솔하여 장흥 경계에 들어와서 장흥성 남문 밖 향교마을에 주둔하였다. 이들은 1895년 1월 1일 보성으로 돌아갈 때까지 머물며 장흥지역 농민군을 체포·처형하였다.장흥향교 앞에는 공덕비들이 모아져 있으며, 그 가운데는 장흥부사를 역임한 이용태의 ‘흥학애사비(興學愛士碑)’가 남아 있다. 1894년 음력 1월 10일에 고부에서 전봉준 등이 봉기하자 조정에서는 장흥부사 이용태(李容泰)를 고부 안핵사(按覈使)로 임명하여 고부농민봉기와 관련하여 조사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용태는 농민봉기가 일어난 사정을 조사하기보다는 이미 해산한 고부농민들을 동학교도로 몰아 함부로 살육을 자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전봉준은 이용태의 만행이 재차 기포한 직접적인 계기였음을 밝힌 바 있다. 탄압을 견디지 못한 전봉준 등은 무장(茂長)으로 피신하여 대접주 손화중의 협력을 얻어 3월 20일 제1차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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