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 7월 말 장흥부사로 임명된 박헌양(朴憲陽)은 장흥지역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한 수성군을 조직하기에 앞서 장흥향교에서 삭망례(朔望禮)를 올림. 박헌양은 장흥지역 유림들에게 “지금 인민(人民)이 어리석게 빠져있고 이류(異類)가 창궐할 때에 정학(正學)을 밝히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언급하고 수성군을 조직할 계획을 세움
이후 1894년 12월에는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남하한 스즈키 야스타미(鈴木安民)가 이끄는 일본군 1중대가 장흥향교에 주둔함. 일본군 1중대는 일본군 220명에 조선인 인부 150명으로 구성된 부대로 1894년 12월 1일 부산을 출발하여 12월 24일 오후 4시경에 장흥에 도착함
이들은 1895년 1월 1일 보성으로 돌아갈 때까지 머물며 장흥지역의 동학농민군을 체포, 처형함
고증내용
「양호우선봉일기」 3: 1894년 12월 25일. 일본군 사관 미나미 쇼시로(南小四郞)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삼가 말씀을 드립니다. 부산에서 육지에 내린 귀국의 중대장 스즈키(鈴木安民)가 보성에 주둔하였고, 24일 신시(申時, 오후 3시~5시)경에 대략 2개 소대 규모의 부대를 인솔하여 장흥경계에 들어와서 장흥성 남문 밖 향교마을에 주둔하였습니다. 25일에 병사를 쉬게 하려고 움직이지 않았고, 보성에는 1개 소대만 남겨두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스즈끼대위의 전진과 정지를 저희 쪽에서 탐문하여 보고하라고 전에 말씀하신 적이 있기 때문에 이처럼 보고합니다.”라고 하였다.
「육유재유고」: 박부사의 의로운 행적(朴侯義蹟). 부사는 부임한 다음날 아침에 바로 교당(校堂, 향교)에 나가 향(香)을 올려 예(禮)를 마치고, 유림(儒林)과 당시의 소요를 생각할 때에 척사위정(斥邪衛正)의 뜻이 낯빛과 말에 간절하였고, 먹고 잘 때에도 그치지 않았다. 탄식하여 말하기를, “지금 인민(人民)이 어리석게 빠져있고 이류(異類)가 창궐할 때에 정학(正學)을 밝히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하고 해당 면(面)에서 제법 가까운 훈임(訓任)을 가려 뽑아 비용을 내어 물자를 지급하였으며, 그 다음 무기를 수선하여 성(城)을 방어할 방도를 삼았으니, 대개 고을을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 먼저 할 일과 뒤에 할 일을 알았던 것이다.
「영회기」: 영회단(永懷壇). 박부사는 정사(政事)에 나온 날에 먼저 향교(鄕校)의 삭망례(朔望禮)를 실행하고 유림(儒林)들과 당시의 사태에 대해 말하였다. 음(陰)을 누르고 양(陽)을 지탱하며 사학(邪學)을 척결하고 정학(正學)을 지킬 것을 간절하게 훈계를 하며 말하기를, “이처럼 도도한 세상에서 강학(講學)을 잠시라도 몸에서 떠나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고 각 면(面)에서 큰 덕이 있는 사람을 골라 훈장(訓長)에 임명하고 날마다 강의를 받게하고 창고 곡식을 내어 식량을 지급하고 무비(武備)를 수련하여 적을 막을 계획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