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연락처
기념재단
TEL. 063-530-9400
박물관
TEL. 063-530-9405
기념관
TEL. 063-530-9451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로고

SITEMAP 전체메뉴

유적지 정보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장흥 동학전투 관군 추모사당 영회당 (장흥군 장흥읍 예양4길)
  • 지 역
  • 전남
  • 주 소
  •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예양리 78
  • 문화재
  • 분 류
  • 추모관
  • 정 의
  • 장흥 전투시 전사한 부사 박헌양과 장졸들의 추모 사당
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 12월 5일 벌어진 장흥성 전투는 장흥일대 동학농민군의 승리로 마무리됨. 장흥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당시 장흥부사였던 박헌양(朴憲陽)을 체포하여 문책하였는데, 박헌양은 되려 동학농민군을 꾸짖다가 결국 처형됨
장흥성 전투에서 성을 수비하다 희생된 수성군 장졸의 수는 96명임. 전사자가 대다수였지만 체포되어 처형된 장졸도 있음. 이때 박영수(朴永壽)와 수성별장 임기남(任璂南, 昶南), 통장(統將) 주두옥(周斗玉), 호위장(護衛將) 주열우(周烈佑)도 같이 희생됨
처형된 박헌양의 시신은 1894년 12월 7일 김용후(金容厚)와 백우인(白禹寅)이 수습하여 장래를 치름. 이후 이들의 순절을 기리기 위해 양호순무영의 우선봉장이었던 이두황은 포상을 베풀고, 1898년 장흥성 북문 밖에 순절단을 설치하기도 함
1899년 기우만은 수성군 장졸을 기리는 비문을 지었고, 순절단 옆에 ‘갑오동학란수성장졸순절비’를 세움. 1928년에는 순절단과 순절비를 장흥 남산공원 기슭으로 옮기면서 ‘영회당’을 건립함. 이후 희생된 장졸들의 후손들은 매년 3월 15일 96인의 희생자를 기리는 제례를 올리고 있음
고증내용
「영회당사집」: 영회당 중건기(永懷堂重建記). 고종(高宗) 갑오 12월 5일에 동학적(東學賊)이 장흥부를 침범하여 부사 박공(朴公) 헌양(憲陽)이 죽고, 기실(記室) 박영수(朴永壽)와 장좌(將佐) 임기남(任璂南)·주두옥(周斗玉)·주열우(周烈佑)·김창조(金昌祚) 등이 모두 따라 죽고 한 사람도 적을 따르지 않았다.…(중략)…순무사(巡撫使) 이도재(李道宰)가 장흥(長興)에 왔다가 이 일을 듣고, 그 사당의 이름을 영회당(永懷堂)이라고 이름하고 그 계에 부조도 하였다. 어사 이승욱(李承旭)도 그들을 위해 시(詩)를 짓고 그 일을 크게 드러내었다. 충의가 사람을 감동시킨 것이 진실로 이와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당이 불탔는데, 계장(契長) 김영익(金榮翊)이 부계장(副契長) 김석신(金晳信)과 함께 이것을 없어지게 해서는 안된다고 여겨 예양강(汭陽江) 옆에 땅을 살펴보아 예전대로 중건(重建)하였다.
「영회당사집」: 영회당 시의 서문(永懷堂詩序). 마침 관산(冠山)의 아전이 급히 달려와서 호소하기를, “그들의 전 부사(前 府使) 박공(朴公, 박헌양)이 동비의 난리를 맞아 적에 대항하여 의에 용감하였고, 기실(記室)과 장리(將吏)까지 의를 따라 죽은 자가 90여 명이었습니다. 현(縣)의 수령 이공(李公)과 관찰사 윤공(尹公)이 그 의를 사모하여 비각(碑閣)을 도와서 세우고 그 제당(祭堂)을 군(郡)의 경내 동쪽 성문(城門)안에 마련하여 영회(永懷)라고 이름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갑오실기」: 갑오년 12월. 장흥부사 박헌양(朴憲陽)은 고을을 지키다가 국난에 죽었으니 그 지조가 가상하니 특별히 내무아문 참의(內務衙門參議)를 추증하며, 병마우후(兵馬虞侯) 정규찬(鄭逵贊)에게는 특별히 군무아문 참의(軍務衙門參議)를 추증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송사집」: 장흥부사 박공 제단비. 아! 이것은 순절(殉節)한 부사(府使) 박공(朴公, 朴憲陽)의 제단(祭壇)이다. 갑오년(甲午年, 1894) 사악한 비도(匪徒)가 무리를 지었으나, 여러 읍들의 수령은 바라만 보고 성문을 열어 바쳤다. 제법 정도(正道)를 지닌 자도 관인(官印)을 풀어버리고 갔으나, 박헌양(朴憲陽)은 그 때에 장흥에 부임하여 여러 차례 남쪽의 군(郡)을 맡아 성적(聲績)이 평소에 드러나서 참으로 큰 물결에 버티고 있는 지주(砥柱)였다. 이 때에 이르러 의(義)를 부여잡고 사도(邪道)를 배척하며 성(城)을 방비할 방편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저들의 숫자가 많고 공의 군대는 적었으나 다섯달 동안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임금의 군대가 남쪽으로 내려왔을 때 저들이 궁색한 도적이 되어 그 해독(害毒)을 저질렀으나, 적은 수가 많은 수를 대적할 수 없는 것도 형세가 반드시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한번의 죽음이 백만의 군대보다 강하였고, 때에 맞게 안개가 걷힌 것[동학농민군이 패한 것]도 의롭게 한번 죽은 공(公)의 힘이었다.
「영회기」: 영회단(永懷壇).
논저
논문명(서명) 저자/필자 발행연도 쪽수
「장흥지역 동학혁명연구」 표영삼 2000
이상식 외 1996
사진(4)

영상
드론VR 사진에 마우스를 올려서 움직여보세요
지도
참고문헌
연관 유적지
이 페이지에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을 반영하는 재단이 되겠습니다.

(56149)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ㅣ 사업자정보확인 404-82-08587 ㅣ 통신판매업신고 2023-전북정읍-0046호

문화체육관광부 전북특별자치도청

예약하기예약

찾아오시는길오시는길

위로

조직도 조직도

조직도 유족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