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장흥과 강진 지역의 동학농민군은 이방언(李邦彦), 이인환(李仁煥), 구교철, 이사경을 비롯한 많은 접주들이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에 합류하면서 부터임. 그러나 이들의 장흥에서 활약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시기는 1894년 10월 중순 무렵임
이와 맞물려 1894년 7월 장흥부사로 부임한 박헌양은 10월경부터 장흥 일대의 동학농민군 토벌을 위해 수성소를 설치함. 1894년 10월 19일부터 벽사역 찰방, 장흥부사, 강진현감, 전라병영성 병사들은 일제히 동학농민군 진압을 시작함
이를 계기로 장흥·강진지역의 동학농민군은 1894년 11월 초순, 함열과 금구 등지의 동학농민군에게 지원을 요청함. 한편 강진현에서는 10월 29일 순무영에 급보를 보내 병력 파견 요청을 함
1894년 11월 하순 장흥일대 동학농민군은 장흥관아 공격을 위해 웅치로 집결함. 이어 보성으로 이동했고, 금구, 화순, 능주 일대의 동학농민군도 이들에게 합세하여 1894년 12월 1일 장흥 북면의 사창으로 진출함
장흥부사 박헌양, 전라병영성의 서병무 병사, 벽사역 찰방 김일원, 강진현감 민창호는 동학농민군의 공격에 대비책을 마련함. 이어 1894년 12월 3일 장흥 사창에 집결했던 농민군은 벽사역으로 진출하였고, 12월 4일 새벽 벽사역관에 포격을 가해 점령함
벽사역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12월 5일 새벽 장흥성을 동서남북으로 포위하고 동이 틈과 동시에 공격을 개시함. 동학농민군 주력부대는 장흥성 동문을 공격하여 입성하였고 이어 남문과 북문도 공격에 성공해 동학농민군이 장흥성으로 진입하게 됨
동학농민군의 거센 공격에 장흥성 수성군은 후퇴하였고, 장흥부사 박헌양은 체포되었지만, 되래 동학농민군을 꾸짖다가 처형됨. 이 전투에서 희생된 수성군 장졸은 96명으로 집계됨
고증내용
「갑오실기」: 갑오년 12월. 12월 27일. “방금 전라병사(全羅兵使) 서병무(徐丙懋)의 등보(謄報)를 보니, ‘비적(匪賊)이 더욱 만연하여 이 달 4일 장흥부(長興府)를 함락하고 7일 강진현(康津縣)을 함락하고 10일 병영(兵營)을 침범하여 군사와 백성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죽었으며 장흥부사(長興府使)와 병마우후(兵馬虞候)도 모두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남도(南道)의 비적들이 흩어진 뒤에 이렇게 한 개 영(營)과 두 개 읍(邑)이 연이어 함락당하는 변고가 있었으니, 통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해당 병사는 비록 흩어진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성과 해자를 회복하였다고 하지만, 애초에 지키지 못한 책임을 완전히 용서할 수 없으니, 월봉(越俸) 3등(等)의 벌전을 시행하고, 장흥부사 박헌양(朴憲陽)은 고을을 지키다가 국난에 죽었으니 그 지조가 가상하니 특별히 내무아문 참의(內務衙門參議)를 추증하며, 병마우후(兵馬虞侯) 정규찬(鄭逵贊)에게는 특별히 군무아문 참의(軍務衙門參議)를 추증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난파유고」 권3 부록: 갑오토평일기. 12월 6일에 장흥(長興)에서 성이 거의 함락되기에 이르렀다는 비보(飛報)가 갑자기 왔다.
「송사집」:. 장흥부사 박공 제단비. 박헌양(朴憲陽)은 그 때에 장흥에 부임하여 여러 차례 남쪽의 군(郡)을 맡아 성적(聲績)이 평소에 드러나서 참으로 큰 물결에 버티고 있는 지주(砥柱)였다. 이 때에 이르러 의(義)를 부여잡고 사도(邪道)를 배척하며 성(城)을 방비할 방편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저들의 숫자가 많고 공의 군대는 적었으나 다섯달 동안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임금의 군대가 남쪽으로 내려왔을 때 저들이 궁색한 도적이 되어 그 해독(害毒)을 저질렀으나, 적은 수가 많은 수를 대적할 수 없는 것도 형세가 반드시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한번의 죽음이 백만의 군대보다 강하였고, 때에 맞게 안개가 걷힌 것[동학농민군이 패한 것]도 의롭게 한번 죽은 공(公)의 힘이었다.
「영회당사집」: 어사비제(御史碑題). 갑오년(甲午年) 동비의 소요로 장흥성(長興城) 전체가 불에 타고 함락될 때에 부사 박공(朴公) 헌양(憲陽)과 기실(記室) 박공 영수(永壽)가 함께 해를 입었고, 성을 지키던 장리(將吏)와 군졸(軍卒) 90여 명도 모두 따라죽었다.
「순무선봉진등록」 제5: 1894년 12월 초 8일. 동비 1,000여 명이 장흥(長興) 사창 등지에 모였다가 이달 초 4일 진시 경에 이르러 곧바로 벽사역(碧沙驛)으로 침입하여 관아와 여염집에 모두 불을 지르고 장흥부(長興府)로 향하였습니다.…(중략)…이에 찰방인 제가 이미 면대하여 여쭈었거니와 비류가 장흥성(長興城)으로 침입하여 점거하고 부사를 핍박하니 그의 목숨이 조석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동학농민군이 함부로 날뛰며 겁탈하고 노략질하여 역에 사는 백성들이 도망가고 사방으로 흩어져서 400여 호가 텅 비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순무선봉진등록」 제5: 1894년 12월 초 9일. 장성에서 출발. 이어서 도착한 병마절도사의 공문 내용에, “비류 10,000여 명이 본 병영에서 30리 되는 장흥 등지에 모였다가 이달 초 4일에 벽사역을 불지르고, 초 5일 새벽에 장흥부를 함락시켰습니다. 부사를 잡아 심하게 때려 머리가 다쳤는데 살았는지 죽었는지 분간할 수 없으며, 공형을 총살하고 가호를 불태워 없애고 남녀를 살해하여 흐르는 피가 도랑을 이루고, 부르짖고 통곡하는 소리와 달아나 숨는 모습이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순무선봉진등록」 제5: 1894년 12월 초 9일. 비류가 장흥을 함락한 사정은 어제 이미 급히 보고하였거니와 이어 동태를 탐색하여 보니 비류가 장흥부사를 총살하고 이어 시체를 불로 태웠으며 총검으로 사람들을 찔러 죽여 시체를 쌓아 놓은 것이 산과 같고 피가 흘러 방아공이가 뜰 지경이니 피비린내 나는 악취가 온 성안에 가득하며 각 관아 건물과 인가는 모두 불에 타고 다만 객사만 남았습니다.
「양호우선봉일기」 3: 1894년 12월 18일. 4일 새벽녘에는 장흥관아를 무너뜨리고 들어가서 부사(府使, 박헌양)를 사로잡아 머리를 무수히 때려 생사를 구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공형을 쏘아죽이고 집집마다 불을 지르며 남녀를 죽여서 그 피가 흘러 도랑을 이루었습니다. 울부짖으며 달아나서 숨는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각 처의 비류가 지금 본영과 40리가 되는 장흥의 사창시(社倉市)에 모여 있습니다. 장흥을 무너뜨리고 관아에 들어간 무리와 합세하여 바로 본영을 도륙할 것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