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이방언(李邦彦, 1838~1895)은 장흥 용산 묵촌 출생으로 자는 자방(子邦), 호는 방언(芳彦)임. 대제학(大提學) 이문화(李文和)의 후손으로 오남 김한섭(金漢燮)과 동문수학함
1890년 무렵 이방언은 동학에 입교하여 장흥 어선접의 접주로서 동학농민군의 지도자가 됨. 동학에 입교한 후 포교활동을 전개하였고, 1893년 보은집회에도 참여함.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 뒤 4월 23일 장성에서 벌어진 황룡촌 전투에도 참가하였음
전주화약 체결 후 장흥으로 돌아와 폐정개혁 활동에 종사하였지만, 1894년 9월 새로 부임한 장흥부사가 동학농민군에 대한 탄압을 전개하자 재봉기함
1894년 12월에는 벽사역, 장흥부, 강진, 강진병영을 점령하는데 앞장섰지만 12월 15일 석대들 전투에서 패배하고 12월 24일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체포됨. 나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았지만 무죄로 방면됨
그러나 1895년 4월 27일 장흥에서 다시 체포되어 처형됨. 이방언 묘소에 세워진 묘비는 1982년 그의 후손들에 의해 건립됨
고증내용
「순무선봉진등록」 제5: 1894년 12월 11일. 이달 초 3일 주력부대가 담양부로 들어온 때에 순창의 소모 중군 신기찬과 군관 임민학(林敏鶴)이 그 곳의 병사 150명과 옥과(玉果) 부의군(赴義軍) 100명을 거느리고 약속한 기일보다 먼저 도착하였습니다. 별군관 황범수·이지효·이선과 본부의 의병장 구상순(具相淳), 수성군 통령 박동진(朴東眞), 국치열(鞠致烈), 작대(作隊, 편성한 군대) 별장 국의열(鞠義烈) 등이 꾀를 합치고 있는 힘을 다하여서 본부의 수성군 가운데 300명을 출동시켰습니다. 이 군대를 별도로 정한 부교(府校)가 거느리고 비류를 쫓아가 체포하였는데, 거괴 이장태(李長泰, 이방언의 별명)를 체포하여 그 맹위를 떨치던 기세를 먼저 꺾었습니다.
「순무선봉진등록」 제6: 1894년 12월 21일. 이달 15일 장흥읍(長興邑)에 도착하여 읍의 사정을 정탐하니 지난 초 5일 이방언(李方彦)이 비도 수만 명을 거느리고 성안을 함락하여 여염집에 불을 질러 가옥이 즐비하게 타서 성 안팎에 남아 있는 가옥의 수가 30호에 불과하며, 백성을 살륙하여 쌓인 시체가 산과 같았습니다.
「순무선봉진등록」 제6: 1894년 12월 29일. 유명한 괴수 이방언은 이달 25일에 붙잡혀서 나주에 머물고 있는 일본 주력부대로 압송하였다고 하며, 온 경내를 뒤져서 매일 잡은 동학농민군의 수가 수십 명이 되는데 총살한다고 합니다.
「순무선봉진등록」 제6: 1895년 1월 초 2일. 지금 유명한 거괴 이방언 등 수십 명을 총살하였다하며, 성안이 불 탄 모습은 강진과 똑같습니다.
「순무선봉진등록」 제6: 1895년 1월 초 2일. 유명한 괴수 이방언은 이달 25일에 잡아서 곧바로 나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주력부대에 압송하였다고 하며, 온 경내가 힘을 합하여 매일 잡는 동학농민군의 수가 수십 명이 되는데 총살한다 하며, 성안이 불에 탄 모습은 강진과 똑같습니다. 그리고 당일 신시 경에 보성군에 도착하니 성을 지키는 등의 일이 다른 지역과 현격히 달라 온 군(郡)이 편안하여 경계할 것이 없어서 무사히 머물렀고 장차 흥양 등지로 향하려고 합니다”라고 한바, 역적 이방언은 바로 장흥·강진 병영과 강진읍에서 못된 짓을 한 괴수로 이미 잡혔으니 이루 말할 수 없이 통쾌합니다.
「양호우선봉일기」 3: 1894년 12월 24일. 장흥 남상면(南上面) 집강(執綱)의 보고에, “본 면(本面)의 동학 거괴 교장(敎長) 이방언(李邦彦)註 287과 대정 겸 선봉(大正 兼 先鋒) 고순칠(高順七) 및 도성찰(都省察) 마경삼(馬京三)을 면 안에서 뒤를 밟아 체포하여 올려 보냅니다.”…(중략)…소모관(召募官)의 첩보에, “적괴(賊魁) 이방언(李邦彦)은 남면(南面)의 민군(民軍)이 잡았으나 놓칠 것을 염려하여 경병(京兵)을 요청하였습니다.…(중략)…이 달 24일 신시(申時, 오후 3시~5시)경에 장흥 남면의 민인이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서 전라좌도(全羅左道) 거괴 이방언이란 놈을 찾아내어 체포하고 진영 앞에 압송해서 대령했기 때문에 바로 조사를 하였더니, 정말로 유명한 거괴였습니다. 나머지 적들은 여기서 죽일 계획이나 유명한 적괴 이방언의 경우에는 함부로 죽이는 것이 마땅하지 않아 군사를 파견하여 대대본부(大隊本部)에 보낼 계획입니다.
「양호우선봉일기」 3: 1894년 12월 26일. 일본군 사관 미나미쇼시로(南小四郞)의 진소(陣所)에서 보낸 편지가 이 날 유시(酉時, 오후 5시~7시)에 도착하여 받았다. 그 편지에, “하나. 이방언은 결박하여 나주의 본진(本陣)에 보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양호우선봉일기」 3: 1894년 12월 28일. 장흥 남상명의 유학 백중인(白重寅)이 잡아서 바친 삼남도교장(三南都敎長) 이방언(李方彦)은 문자를 제법 알고 잡술(雜術)에도 통하여 시골사람들을 속여서 그들의 무리에 몰아넣었고, 인의(仁義)를 빌려 어리석은 사람들을 회유하였으며 삼남도교장의 이름을 갖고 흉악하고 예측할 수 없는 모의를 하였습니다. 귀화를 한다고 하여 무리를 인솔해서 성을 지키며 밖으로 적병과 호응하여 성과 본 관아를 무너뜨린 뒤에 그대로 적병과 함께 강진에 갔습니다. 그 흉악한 짓은 전봉준과 손화중보다도 휠씬 더합니다. 그래서 일본군 사관 미나미쇼시로(南小四郞)의 지시에 따라 나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진영에 압송하였습니다.
「양호우선봉일기」 4: 1895년 1월 5일. 이방언은 거괴인 까닭에 포박하여 나주의 대대본부로 압송하였고, 그 나머지 요량하여 처단한 일은 이미 미나미 소좌(南少佐)에게 보낸 편지에 ≪이사경을≫ 죽인 일을 아울러 보고하였는데, 이사경 역시 그 중에 들어 있는 자입니다.